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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립스틱* - 4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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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경기도 부천시 부평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도로 옆의 뉴욕제과점 안에서 강민우는 이진아의 생모인 이미연과 탁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강민우가 토마스 박을 통해 이진아와의 만남을 주선 한 것이다. 제과점 입구의 탁자에는 이미연을 호위하고 온 토마스 박과 미군 CIA요원이 저리를 잡고 앉아 있다.







이미연의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수시로 핸드백을 열어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출입구를 주시한다. 빗줄기는 점점 가세져 도로에는 뿌옇게 비 먼지가 올라오고 사람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제과점 유리창에 떨어진 빗방울이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민우 역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일찍 와서 기다렸기에 벌써 엽차를 세잔 째나 마셨다. 제과점 문이 열리고 스커트를 걸친 여자가 들어왔다. 우산을 펴들고 들어왔기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산이 접혀지고 들어난 얼굴은 여학생이었다. 긴장했던 강민우는 길게 한 숨을 내쉰다.







제과점 밖의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에 작은 배낭을 메고 비옷을 뒤집어 쓴 여자가 들어왔다. 파카에 모자까지 뒤집어써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근처 동네의 여자인지 돌아서서 자연스럽게 비옷을 벗어 털었다. 여자가 돌아섰다. 그러나 파커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확인되지 않는 여자는 유리창 가까이 있는 탁자에 가서 앉는다. 그 여자를 주시하던 이미연과 강민우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과점 안에는 종업원과 CIA요원, 이미연, 그리고 강민우뿐이었다. 종업원이 등을 돌리고 앉은 그 여자에게 엽차를 가져다주었다. 머리에 뒤집어 쓴 파커를 젖힌 그 여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지 종업원에게 먹을 것을 주문을 하지 않았다. 제과점 밖의 빗줄기는 굵어지고 있었다. 오 분 가량 지났을까. 혼자 앉아 있던 여자가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채 일어섰다. 그리고 강민우가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오빠~!”



“........!?”







귀에 익은 목소리에 강민우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깊숙이 눌러쓴 모자 밑으로 나타나 얼굴은 이진아였다. 반가움보다도 격한 감정이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강민우는 입만 벌리고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했던 이진아가 천천히 이미연을 바라봤다. 두 모녀의 시선이 마주치고 내 딸이 맞아? 내 엄마가 맞아? 라고 하는 표정들이다.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듯이 이진아가 강민우 옆에 앉았다. 마주보는 이미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침묵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던 이진아가 고개를 숙이고 운동화를 신은 발로 무엇인가 긁적거린다. 강민우가 힐끔 바라 본 이진아의 크고 까만 눈동자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핸드백에서 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은 이미연이 읊조리듯이 말을 흘려냈다.







“진아야! 이 엄마를 용서해다오. 같이 가자.”



“뭐라고요?”







별안간 서슬이 파래진 이진아가 벌떡 일어나며 앙칼진 목소리를 뱉어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이미연은 추위를 느끼듯 파르르 떨며 이진아를 올려다봤다. 습기가 어린 이진아의 눈빛은 냉혹하고 날카로웠다. 마치 들판을 헤매는 하이에나 같았다. 그녀의 비에 젖은 운동화에서는 물이 흘러내렸다. 불끈 쥔 그녀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제 와서 나하고 같이 가자고요?”



“할 말이 없다. 날 용서해다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용서를 하라고요. 나더러 어쩌라고요! 찢기고 찢긴 내가 용서할 자격이 있어요? 차라리 나를 낳지 마셨어야 했어요. 남자를 사랑해서,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날 낳았나요.”



“이 엄마의 실수였어.”







“실수라고요!? 그래서 나 같은 괴물을 낳았어요. 실수라고 하면 모든 것이 덮어지나요.”



“이제 그만 내가 죄지은 대가를 치룰 기회를 줄 수 없겠니?”







파카에 모자를 뒤집어 쓴 이진아는 괴물은 아니어도 악에 바친 독사 같은 눈빛이었다. 얼굴이 백납처럼 하얗게 변한 이진아는 스스로 광분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는 멈출 수가 없어요. 멈추는 방법도 모르고 여기서 멈추면 나는 죽은 목숨인 거 몰라요. 모르겠죠.......! 여기서 멈추느니 내가 멈추어야 할 곳에서 죽겠어요. 내 몸속에 흐르는 더러운 피를 씻어내기 전에는 멈출 수가 없어요.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나를 더럽힌 놈들의 피가 필요해요. 당신 피도 필요한지도 몰라요.”







부르르 떠는 이진아는 이미연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눈물이 흐르는 이미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진아야.......!”



“내 이름 부르지도 말아요. 난 진아가 아니니까.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놈이 강하다고요! 나를 저주스럽게 만들고 살아남은 놈을 없애야 해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당신을 실수하게 만든 남자를 찾아가보지 그래요. 다시는 나를 찾지 말아요.”







울음이 섞인 이진아의 목소리는 세상을 저주하고 스스로를 자학하는 절규였다. 이미연을 노려보던 이진아가 홀연히 제과점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진아가 제과점을 문을 열고나서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강민우와 이미연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아야!”



“진아야~!”







제과점을 나선 이진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빗줄기 떨어지는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강민우와 이미연도 제과점을 뛰어 나와 이진아를 쫓아갔다. 뒤이어 CIA 요원들도 뒤 쫓아왔다. 이진아는 뒤도 안돌아보고 경인고속도로 옆의 오르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강민우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이진아는 빠른 질주를 하였다.







흙탕물을 튀기며 달리던 이진아가 경인 고속도로 건너편으로 향하는 고가도로로 들어서는 모습이 강민우의 시야에 보였다. 그런데 빗속을 뚫고 달리던 이진아가 고가도로 밑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고가도로로 들어서서 달려가던 강민우가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이진아가 뛰어내린 자리에 도착한 강민우가 숨을 몰아쉬며 고가도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경인 고속도로에는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터보트처럼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행렬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이진아가 달리는 화물차에 뛰어 내린 것이다. 화물차에 올라탄 이진아의 모습이 빗줄기 속에 사라지는 모습을 강민우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강민우의 내부에서는 비애가 엄습하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의식한 비애였다. 또 다시 떠나가 버린 이진아를 붙잡을 수도 없고 광분하는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내기도 막막하였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며칠 밤을 제대로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럴수록 놈들에 대한 적개심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술에 취해도 불면의 독약처럼 더욱 참담한 비애 속으로 몰아넣었다. 황량한 지하 도시 속을 방황하는 심정이다. 모든 것이 구역질나고 무의미하게 보이고 단지 깊은 적의를 품고 흘러간 시간들을 응시할 뿐이다. 과거의 시간을 들추어낼수록 오히려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워진다.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떤 예정되어진 운명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의 벽에 부딪친다. 그 벽은 또 다른 무능력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발톱을 세우고 다가오는 독수리를 피해 볏짚에 머리만 파묻는 꿩처럼 어딘가에 숨고 싶은 절망적인 심정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위안이 되는 사람은 송나희였다. 그녀의 곁에 있는 시간만큼은 어두운 벽이 허물어지고 반전되는 밝은 세계의 시간이었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강민우는 송나희와의 만남이 운명적인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적인 사랑은 필연적인 감정을 수반한다.







피처럼 붉은 와인을 유리잔에 가득 부어서 몇 잔을 마시고 누운 강민우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벽에는 새해를 알리는 달력이 초상화처럼 걸려 있었다. 번민과 갈등, 그리고 뼈아픈 자책감의 시간을 보내느라 어느덧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된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민우의 팔을 베고 옆에 누워있는 송나희가 그의 수염도 깍지 않은 그의 턱을 매만진다. 그때서야 강민우는 자신이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어둠에 묻힌 달력의 숫자가 가물가물하다,







“올해가 몇 년도지?”



“팔십육 년도요.”







년도의 앞 숫자는 설마 모르는 것은 아니냐는 송나희 말투였다. 모로 누운 나희는 동그란 눈동자를 말똥말똥하게 뜨고 강민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초췌한 얼굴이지만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그건 나희가 새삼스럽게 처음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민우는 늘 쫓기고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을 나희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이제 와서야 그런 느낌을 받은 자신이 이상했다.







송나희는 강민우와 몇 번 침대에서 같이 잤던가를 생각해본다. 세 번, 네 번, 어쨌든 그건 중요치가 않았다. 그와 한 침대를 쓰는 시간이 늘어 갈수록 혼자 있는 밤이 외로워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날은 커피 잔이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하염없이 공원을 바라보면서 그의 가슴에 안기는 포근한 순간을 떠올리고 있기도 했다. 남녀가 한 침대를 쓴다는 것은 성적인 교감을 나눈다는 것만은 아니라, 같은 꿈을 꾸고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강민우가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맞춤을 하였다. 그리고 침대이불을 당겨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송나희는 보드라운 시트의 촉감보다는 그의 손바닥에 닿는 따스함이 좋았다. 민우는 나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잠깐 숨을 멎는듯하던 민우가 입술을 떼고 나희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







“나희씨는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언젠가, 민우씨가 말했잖아요. 행복한지 의문스러울 때, 이미 행복한 것이라고요.”







두 사람은 다시 열정적이고 깊은 입맞춤을 하였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목덜미를 핥으며 뜨거운 열기를 일으켰다. 아담한 젖가슴이 그의 손아귀에 갇히고 입술이 닿았다. 떨림으로 안기는 그녀의 몸이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그의 근육질 아래 같혀 반듯이 눕혀진 그녀는 황홀함에 젖는다. 그의 혀가 닿은 곳마다 그녀의 신경이 살아나 꿈틀거렸다. 그의 혀끝이 점점 예민한 감각의 세포들을 건드리고 다니며 밑으로 내려갔다.







“미, 민우 씨........”







민우의 입술은 작은 숲을 이룬 여인의 계곡까지 내려가 머물렀다. 가는 신음소리를 흘리는 나희는 하복부에 머문 민우의 머리를 보듬어 안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하는 흐느끼는 샘물이 흘러나와 몸 전체로 퍼졌다. 다시 타액을 적시며 올라온 민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엉덩이를 보듬어 안은 그의 손바닥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그녀의 허리도 함께 꿈틀거렸다.







“아...........”







강민우는 손바닥으로 들어 올리듯이 나희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좀 더 힘 있게 끌어 당겼다. 살갗과 살갗이 잇닿아 촉감을 음미한다. 민우는 솜사탕같이 달고 단 나희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혀와 혀가 엉키어 서로의 타액을 들이마셨다. 그의 가슴 아래서 파르르 떠는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껴안고 매달렸다.







“으 음.......”







나희는 그의 영혼까지도 받아 드리고 싶었다. 하복부에 잇닿았던 그의 우람한 페니스가 보지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감각에 그녀는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뜨거워진 페니스를 최대한 깊이 받아드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단 몸속 깊은 곳까지 채워진 남자의 몸이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끌어안은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나희.........”



“하 아.......”







나희는 몸속을 채운 페니스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절벽이 무너지는 듯 아찔한 쾌감에 젖어들었다. 그의 체중이 주는 무게감과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한 느낌, 그 모두가 신경을 마비시킨 듯 그녀의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의 남성이 몸속의 예민한 살갗을 마찰할 때마다 그녀는 자지러질 듯이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나희는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지만 자꾸만 미끄러질 뿐이다.







강민우는 마치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지대에 빠지는 것처럼 온 몸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내려 올 때마다 그녀의 둔부가 들어 올려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듯 아찔한 현기증마저 들었다. 그의 몸은 포옹과 떨어짐을 반복하면서 더 깊은 계곡으로 빠져 들었다.







마지막 사랑을 불태우는 영혼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열중하였다. 살갗이 마찰할 때마다 흐르는 여울지는 물소리와 함께 깊은 신음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민우는 과거의 시간을 흘려보내듯이 그녀를 거친 파도로 내몰았다. 오르가즘의 절정을 오르내리는 나희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번져 나왔다. 제발 그만! 이라고 말하고 싶은 혀는 민우의 혀와 얽혀들어 있었고, 그의 어깨가 내리눌리는 무게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남자의 몸이 한 번씩 밀착해 올 때마다 그녀는 구름을 타고 어디엔가 두둥실 떠오르고 있는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절정에 다다른 남자의 몸이 격렬하게 움직였을 때는 거의 정신이 가물거릴 지경이었다. 열정에서 배어나온 습기로 침대시트가 촉촉하게 느껴졌다. 순간 그가 부르르 떨며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경직되었다. 그녀는 몸속을 채우고 꿈틀거리던 그의 페니스에서 뜨거워진 사랑의 씨앗이 몸 속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거친 호흡을 흘리는 그가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려 주었다.







“사랑 해.........”



“나, 어떡해.........그냥, 이순간이........ 영원했으면.........”







육체의 언어를 끝난 뒤의 나른함 속에서 흘리는 언어는 황홀한 꿈의 멜로디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등을 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얼굴이 살갗에 닿으면서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졌다. 그는 잠시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였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란히 누운 그들은 서로의 나른한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겨울바람이 창문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원 너머 어디론가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문을 비치고 지나갔다. 침묵이 흐르고 거칠었던 민우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나희는 고개를 돌려 어느새 잠이든 민우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다. 나희는 이 순간의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남산 안기부 청사 6층의 고위 간부 방에는 고급 가죽 제품의 큰 소파가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파 뒤의 출입구 맞은 편 벽 쪽에 걸린 국기와 국가원수의 초상화 밑에 권위를 나타내듯이 큰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다. 사방의 벽은 온통 흰색으로 칠해져 있고 가구가 별로 없어 방금 옮겨온 사무실 같은 분위기이다. 단지 벽에는 대형지도 한 장과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어 쓸모없이 넓게만 보이는 방에는 위압감이 서려있다.







바람소리조차 없이 갇혀진 공간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는 방의 주인을 방문하는 안기부 요원들은 별로 없었다. 책상 앞에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 정보국장 차문기는 검은 안경을 낀 남자의 표정을 살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심사숙고 생각하기 시작한 검은 안경의 남자는 전혀 감정을 들어내지 않고 있다. 침묵을 깨고 간신히 들릴만한 저음으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신원을 확보했다고?”



“네. NTIS의 강민우 요원이 데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강민우의 주민등록에 동거인으로 올려 있었고, 얼마 전에 이진아의 어머니가 찾는다는 방송도 강민우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고 있는 하남에 잠복근무를 하고 있으나 여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 자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있었을까? 혹시 JRS멤버 아닌가.”



“그것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파견요원의 연락은 없었나? 그 아이 엄마에 대한 소식은?”



“미군 항공편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정보인데, CIA 보호를 받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CIA가.......!?”



“네.”







“GIS 참모들은 뭐라고 해?”



“일단, K님의 의견을 들어 보라고 해서........”



“흠........!? 본인들의 입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인데........”







혼잣말처럼 질문을 던진 안경의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천천히 두들겼다. 자신의 질문에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고심하는 행위인 것 같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를 따라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시에 들렸다. 그는 혼잣말로 자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의 그동안 행적은 뭐고 어디에 있었을까.......? 문제가 복잡해지는데.......”



“..........!”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고 그가 결심을 한 듯 그가 불쑥 일어났다. 그가 지시하는 목소리를 조금 더 확실하게 듣기 위해 차 국장이 한 걸음 다가서며 귀를 기울였다. 차 국장은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검은 안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검은 안경 밑의 두툼한 입술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감찰실 홍 실장에게 지시해. 빠른 시간에 내막을 알아보고, 그 아이의 행방을 찾도록 하라고.”



“네.”







차 국장이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밀실을 나가는 차 국장의 뒷모습을 바라본 남자는 천천히 밀실 공간을 한 바퀴 걸었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집어 들고 버튼을 눌렀다. 교환요원에게 남산 분실 홍실장과 연결해 달라고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그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강민우는 방이동 NTIS 본부 주차장으로 승용차를 몰고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에 언제나 떠오르고 있는 생각은 이진아의 질주를 막고 위험에서 구해내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네놈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송나희에게 놈들의 명단을 넘겨주고 암암리에 신원을 조회중이나 실명인지도 모르고 너무나 광범위하고 막연하기만 하였다.







주차장 입구로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서 주차를 시킨 강민우는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근처에 세워진 지프차 문이 열리고 낯설지 않은 안기부 요원 두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강민우가 광릉에서 근무할 당시 안면이 있던 요원들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강민우는 별 생각이 없이 그들을 힐끔 바라봤다.







“강민우 씨! 잠시만 요.”



“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서 강민우의 양 옆에 버티고 섰다.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안기부 요원이기에 강민우는 멀거니 그들을 쳐다봤다. 그런데 별안간 한 요원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옆구리에 권총을 들이댔다. 동시에 다른 요원이 그의 팔을 낚아채어 뒤로 꺾으며 겨드랑이에 찬 권총을 빼앗아 갔다.







“뭐야! 당신들.”



“정보국에서 나왔습니다. 같이 가 주십시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강민우가 그들을 뿌리치려고 몸을 틀었으나 이미 뒤로 꺾인 양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다.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이라 방심하였고 무방비상태로 당한 일이었다. 그들은 몸을 뒤트는 그를 지프차로 끌고 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요원도 내려와 합세하였다.







“당신들 뭐하는 짓이야? 사무실로 가서 얘기해.”



“잘 아시잖습니까! 잠시 동행하면 됩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려는 강민우를 그들이 강제로 지프차에 태웠다. 강민우는 자신을 강제 연행하는 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각가지 추측을 떠올렸다. 그러나 일단은 그들의 지시대로 따르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민우를 태운 지프차가 주차장을 떠나 잠실대교를 건넜다.







그들은 체포해가는 이유도 밝히지 않았고 지프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지프차는 광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남산 방향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강민우는 무엇인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프차가 도착한 곳은 안기부 남산분실이었다.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기관으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에 강민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군복 차림의 수사요원이 강민우를 인계받아 지하 별관으로 데려갔다. 별관으로 이어지는 축축하고 음습한 통로에는 보안요원의 군화발자국 소리가 반사되어 울려왔다. 취조실과 유치장을 지나 강민우가 끌려들어 간 밀실은 많은 정치인들을 고문한 장소였다. 욕조와 책상, 의자 가 있는 좁은 밀실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두 평 남짓한 밀실의 벽에는 ‘민주주의 만세’ 같은 글들이 피 빛으로 새겨져 있고 한쪽 벽면에는 검은 색 유리창이 있었다. 밀실에서 알아 볼 수 없는 유리창 너머는 밀실을 감시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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