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로리 - 1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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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야설 작성일 24-11-10 08:19 조회 6 댓글 0본문
11. 텅 빈 거리에서 (전편)
……
……
…어떻게 된 거지.
눈 앞의 물체가 흐릿하게 떠오르다 서서히 또렷해진다.
보이는 것은 큰 창문.
창 밖으론, 어제 내린 눈이 쌓였는지 온통 흰색으로 덮여 있는 거리가 보인다.
매우… 생경한 풍경이다.
다시 눈을 감자, 오래 지나지 않은 지난 일들이 갑자기 스쳐 지나간다.
그래, 그건 지난 9월 어느 날 저녁의 일에서부터…
……
……
……
“…실례합니다만, 정혜경씨죠?”
“네? 그런데요…?”
고개를 드니 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말쑥한 차림의 남자.
나이는 한 30대 중반 정도 되려나.
“안녕하세요. 오늘 뵙기로 한 박수현입니다.”
“절… 만나기로 하셨다구요?”
“예, 어머니한테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엄마랑 같이 나온 건데요. 지금 잠시 화장실에… 아.”
…이런. 그랬던 건가.
이런 식으로 선 자리에 끌어내다니.
가방 챙겨 가시길래 화장이라도 고치시려는 건가 했더니만… 그냥 집에 가버렸을지도.
남자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고 내 앞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갑자기 장소를 바꾸셔서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꾼 건 아니지만 말이죠.”
무슨 일로 엄마가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가 했더니, 결국 이거였나.
호텔 라운지로 나오라는 걸, 귀찮아서 회사 근처 커피빈으로 가겠다고 하고 끊었었다.
엄마도 꽤나 당황했겠지만 지금 나만큼은 아니겠지.
지금 그냥 이 자리를 떠버려도 내 책임은 아니다. 그래…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네…? 아…뭐, 고맙습니다.”
내 사진도 보고 왔나 보다. 하긴 그러니까 날 알아볼 수 있었겠지.
이거 왠지 굉장히 짜증이 난다.
그게, 왠지 몰카를 찍힌 느낌이랄까. 난 전혀 모르는 상대방에게 내 정보가 넘어가 있다는 것.
“저기,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오셨나요?”
“음… 여러 가지요. 이름 정혜경. 27세. A여대 졸업, 영화기획사 ‘가을’ 근무…”
“스물여덟인데요. 줄여주셔서 고맙긴 하지만…”
“아, 보통 인적사항은 만 나이로 이야기하니까요.”
“그런가요.”
뭐야 이 사람.
“또 양친 다 계시고, 2녀 중 차녀.”
“…지금은 외동딸이지만요.”
“아, 죄송합니다.”
“아녜요. 벌써 1년 다 되어가는데요 뭐. 그게 다인가요?”
“뭐 그렇죠.”
“뒷조사를 당한 것 같아 찜찜한데요. 뭔가 불공평한 느낌도 들고.”
“아, 이 모든 정보들은 혜경씨 어머니께서 넘겨주신 것이고, 원하시면 제 정보도 아낌없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사실 별로 안 궁금한데…”
“안 궁금하세요? 허허, 이걸 어쩌나.”
“…….”
“…….”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그는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괜히 내가 미안해져서 말을 잇는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성함이…?”
“박수현입니다.”
“박수현씨는 뭐하는 분이세요?”
“변호사요.”
“음… 그랬군요. 또요.”
“35세. B대 법대 졸업, 로펌 K&K 소속, 2남 1녀 중 장남…”
“잠깐만요, 역시 만 나이인가요?”
“예.”
“꽤 늦게까지 결혼 안 하셨네요. 사시 합격한 다음에 여자들이 줄을 서지 않던가요?”
“그다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요.”
“…줄섰던 건 맞나 보네요.”
“하하,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가 멋적은 듯이 웃는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웃는 걸 보니 순박해 보이긴 하군.
……
이것저것 부담 없이 얘기하다 보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이안 오빠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분명 8시 정각. 이쯤에서 태클을 걸어야겠다.
“아까 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중요한 게 한 가지 빠진 게 있더군요.”
“뭡니까?”
“제가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거요.”
“아… 그렇습니까.”
그가 약간 표정이 변했다. 오늘 처음으로 보이는 당황스런 표정이다.
왠지 모를 희열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친다. 하하하.
“선보는 자리에서 실례인 줄은 알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아, 아닙니다. 혜경씨가 알고 나오신 자리도 아닌 것 같으니까요.”
예의바른 대답. 생각보다 매너 있군.
그건 그렇고 이 남자, 금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회복이 굉장히 빠른데.
“…그럼 전 그만 일어나 볼게요. 제 엄만 화장실이 아니라 집에 가신 듯 하니…”
“혜경씨.”
“네?”
난 빈 커피컵을 들고 일어서다 만 엉거주춤한 상태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분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네…?”
“아, 제 말은, 지금 사귀신다는 그 분과 결혼 계획이 잡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아… 그건…”
오빠가 나랑 결혼?
우리가 그런 얘기를 했었던가?
그 동안 숱한 맞선 자리를 거절하면서도, 우린 정작 그 쪽으론 자세하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오늘 즐거웠구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모른 채 서 있는 내게, 그는 미소를 띄우며 명함을 내밀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왠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
“엄마, 도대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 어떻디? 괜찮지?!”
“아휴, 엄마, 말도 안 하고 그럼 어떻게 해?! 나 황당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야.”
“얘, 엄마가 물었으면 대답 좀 해 봐라. 어떻드냐고…?”
“엄마 내가 먼저 물었잖아…! 아휴 나 못살아…”
“아니 너 선 얘기만 나오면 펄쩍 뛰니까 그랬지…! 너 혹시 그냥 나왔니?!”
“아니… 어떻게 그냥 나와. 한 한 시간 정도 얘기했어.”
“꼴랑 한 시간? 그래, 박변호사 사람 괜찮아 보이지 않든?”
“아 몰라... 끊어요.”
…엄마한테 전화하고 나니까 더 짜증이 난다.
……
이안 오빠는 스타벅스 2층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오빠….”
“아, 왔어? 나가자.”
“아니, 잠깐만 앉았다 가자. 아휴, 오늘… 근데 그거 무슨 책이야? ”
“으응, ‘연금술사’라는 책. 왜?”
“오빠가 전공과 관련 없는 책 보는 거 첨 보는 것 같아서.”
“…그랬던가.”
보통은 묵직한 하드커버나 복사물을 들고 있었지.
“가끔은 문학작품도 읽어줘야 할 것 같아서. 항상 논리적으로 따지고만 드니까 감성이 메말라가는 것 같아.”
“아하….”
“이래 보여도 고등학교 때까진 문학소년이었다니까.”
그는 작고 앙증맞은 책을 들었다 놓으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이거 말야. 시작이 굉장히 웃겨. 오스카 와일드 판 나르시스 이야기를 인용했는데…”
자아도취 미소년 나르시스가 빠져 죽은 뒷이야기.
그가 자신을 비춰보다가 몸을 던져 죽은 호수가 나르시스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호수 역시 나르시스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얘기.
진짜 오스카 와일드가 그 얘길 썼는지는 몰라도 좌우간 지독한 독설이다.
“결국은 다들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산다는 얘기겠지.”
“…그럴까.”
아아, 오빠 설명이나 분석을 듣다 보면 문학작품마저도 과학적이야.
“근데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오랜만에 혜경이 보니까 참 좋다. 하하.”
이 사람은 오늘의 내 행위를 어떻게 분석할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애정 어린 그의 눈빛을 받다 보니, 왠지 맞선 얘기를 하기가 싫어지기도 했고.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 어차피 그 사람 다시 볼 것도 아닌데.
……
대충 저녁을 먹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9월 중순의 가을 밤은 왠지 쌀쌀하니 기분이 좋다.
“아니 오늘도 회사 다녀왔다고? 토요일 원래 놀지 않았어?”
“요즘 좀 바쁘잖아. 아마 한동안은 계속 토요일 출근할 거 같애.
…그래도 오늘은 점심때쯤 끝났어. 낼은 놀아.”
“그럼… 오늘 내 방에 가지 않을래?”
“응?”
오올, 슬쩍 지나가는 식으로 유혹하는데. 딴 데 보면서.
…설마 아직도 그런 말 하기가 민망한가?
하긴 오빠 방에 가본지도 꽤 된 것 같다. 올해 긴 소매 옷 입게 된 이후론 안 갔던가.
“내일 출근 안 하니까, 자구 가라.”
“글쎄… 어떻게 할까…?”
“어….”
“좀 피곤하기도 하고…”
“요즘 우리, 자주 못 봤잖아.”
내가 짐짓 딴청을 피우자 내 쪽을 다급하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
…후후, 빨개졌다. 빨개졌다.
내가 못 살아….
“아~아, 불쌍해서 한 번 들러드려야겠네요.”
“헤헤, 잘 생각했어.”
“어디서 케잌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괜찮아. 안 사가도.”
어, 웬일이야? 케잌 매니아가…
……
“난 조금 있다가 들어갈까?”
“아니, 괜찮아. 들어와.”
이안 오빠는 망설임 없이 그의 원룸 문을 열었다.
환기가 잘 된, 정돈된 방이 우릴 맞았다.
“호… 오늘 나 초대할 작정을 하고 있었네… 깔끔하게 청소까지 해놓구.”
“아니, 나 원래 깔끔하잖아.”
“원래 깔끔하다고 해도 수준이 다른걸. 이건 또 뭔가...”
식탁 위에 놓인 케잌이 바로 눈에 띄었다. 딸기인가.
“진짜 단단히 준비한 거 아냐? 히힛… 나 안온다구 그랬으면 울었겠네~.”
“쳇, 그래 맞다. 그래서 싫어?”
“아니.”
난 몸을 돌려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너무 좋아….”
“혜경아… 음…우웁…”
언제나 그는 나의 포로였다… 내 입술이 그와 한번 엉킨 후엔.
……
……
“음! 으음! 아! 아! 아~!!”
“헉…헉헉… 허억…”
그는 내가 위에 올라오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뭐, 나도 싫진 않다.
내 밑에 깔린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몽롱한 상태...
…나도 오늘따라 느낌이 빨리 온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엎드려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빠 눈 떠봐. 나 좀 보면서 해줘…”
“아… 어어, 오랜만이라 좀 자극이 심해서…”
“정말…?”
“응, 허억…?!”
내가 갑자기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가 짧게 신음을 내지른다.
“하, 하아…! 아! 아! 아…”
“혜, 혜경아 나 이제….”
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나의 엉덩이를 부여잡고 밑에서 강하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하으응…”
“으윽…!!!”
순간 경직되며 부르르 떨리는 그의 몸.
따뜻한 기운이 하반신을 타고 전해진다.
……
“뭐야, 케잌도 안 먹구선. 무드도 없이.”
“그러길래 누가 들어오자마자 키스하래…?”
“어, 내 책임이라는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땀에 흠뻑 젖은 알몸으로, 그와 나는 한동안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먹고 싶어?”
“응?”
“식탁 위에 있는 케잌.”
“음… 글쎄. 자긴 아직 좀 이르잖아.”
“그럼 이거 입어.”
그는 옷장을 열어, 자신의 하얀 와이셔츠 한 장을 건네주었다.
“발가벗고 커피 마시기는 좀 그렇지?”
“그러네…”
……
와아, 예쁜 딸기 무스 케잌…
역시 케잌 매니아다. 어디서 산 건지, 맛도 각별한 걸.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문득 커피잔을 들고 가만히 날 바라보는 그가 신경쓰였다.
“오빠 안 먹어?”
“아니, 난 이 쪽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그는 가만히 잔을 놓고 곁으로 다가와, 내 입술에 묻은 케잌을 핥았다.
“우음… 오, 오빳~!”
“…후후, 달구만.”
그는 한참을 그렇게 내 입을 가지고 놀았다.
내 입술과 입 속에 더 이상 케잌의 흔적이 남지 않을 때까지.
어느새 다시 상기된 얼굴로, 그는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오빠, 또 해…?”
“사실 이 셔츠, 단추가 잘 풀어지거든.”
“아이 참…”
…결국 그날 밤, 우리가 잠든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
그로부터 열흘쯤 뒤.
엄마랑 만나기로 했다. 그 때 얘기도 할 겸.
그런데…
“아니 엄마 지금 어디야? 백화점 앞에서 7시에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이구 얘,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깜박했구나. 곧 나가마.”
엄마가 준비해서 여기까지 오시려면 아마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으아… 읽을 책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기엔 짧은 시간이다.
친구들한테 전화질이나 해 볼까... 한 시간 동안?
일단 자리를 옮겨야지. 여긴 너무 시끄럽다.
“어…”
“어머나.”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웬 남자가 눈 앞에 서 있다.
이 낯익은 얼굴은 분명 지난번에 선보러 나왔던 변호사 아저씨.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글쎄요. 전 엄마 만나러 나왔지만… 설마, 저 보러 나오신 건 아니겠죠?”
“…예?”
“…저희 어머니랑 또 연락이 되셨다던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날 이후 그가 몇 번인가 전화를 남겼지만, 연락하진 않았었다.
만약 지난번과 같은 패턴이라면 진짜 용납할 수 없다.
“아, 아닙니다. 전 오늘 진짜 다른 일로 여기 나온 겁니다. 친구가 밥을 사기로 해서…”
“…정말이에요?”
“8층에서 파는 비빔밥, 정말 맛있던데요.”
그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부인한다.
으음. 아니었나.
“…그렇다고 해도 저랑 우연히 마주쳤다는 데는 동의하기 힘든데요. 이렇게 구석에 있었는데.”
“아, 사실 밥 먹고 나오다가 혜경씨가 보이길래 이 쪽으로 나온 건 맞습니다.”
“……에.”
“혜경씨처럼 이쁜 여자는 사실 좀 눈에 잘 띄어서….”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뭐야, 꽤 솔직하잖아.
…아니, 서툰 작업인가??
“누구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아, 어머니라고 하셨죠.”
“네, 한참 뒤에나 오실 것 같지만 말이죠.”
앗, 나도 몰래 푸념을 해 버렸다.
“늦으시나 보군요. 음… 공교롭게도 저도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빕니다만.”
“…….”
“괜찮으시다면 2층 카페에서 같이 기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기 심심할 텐데, 뭐 말동무나 해 줄까.
……
“…그렇게 해서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아, 지루하시죠?”
“아, 아뇨. 재미있어요. 진짜.”
“그거 다행입니다. 휴.”
진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그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권위적인 것 같지도 않고.
법조계 사람들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 조금은 깨졌을지도.
그가 시계를 흘끔 본다.
“어머니 오실 때가 다 된 것 같군요.”
“그러네요.”
“자리를 뜨기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뭔데요?”
편안히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한다.
“지난번에 드린 말씀의 연속입니다만….”
“…….”
“…지금 만나는 분과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뭐라고 해야 될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이미 ‘네’라고 말하기엔 공백이 너무 길어져 버렸어.
“그, 글쎄요.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그렇습니까?”
“전 굳이 빨리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또… 저기, 맞선 분위기를 조장하시면 부담스럽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변호사 아저씨.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혜경씨 어머니께선 다르게 생각하고 계신 듯 해서요.”
“…….”
“사실 저도 끌려가듯 결혼하는 건 절대 반대입니다.”
그가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빨리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있진 않았겠죠.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염두엔 두고 있어서, 나름대로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
“만약에 진지해지신다면, 저란 사람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란 얘기죠.”
화를 내어야 하는 건가? 지금 자기한테 시집오란 얘기 맞지?
그런데, 워낙 조심스럽고 어정쩡한 말투라 어떻게 화를 내야 할 지도 애매하다.
난감해하고 있는 나를 남겨두고 그가 먼저 일어선다.
“또 뵙죠. 아, 맞선 분위기 나는 얘긴 다음부턴 안 할 겁니다. 그럼...”
……
원래 엄마한테 맞선 관련해서 따질 예정이었는데,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서 아무 말 못했다.
혼자 집에 돌아오는 동안, 무심히 들었던 변호사 아저씨의 한 마디가 머리 속을 계속 맴돈다.
(…지금 만나는 분과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그런 얘기 못하고 그냥 잤었지.
이안 오빠랑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
“가끔은 오빠가 먼저 전화해 주면 안돼?”
“아니, 지금 선생님하고 일 얘기를 하다 늦어서…”
“됐어, 정말.”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안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답답한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빠 공부 언제 끝나는데?”
“너 알면서 왜 또 이래… 나 이제 박사 1년차잖아.”
“…….”
“무슨 일 있지? 간단하게 말해 봐.”
무슨 얘기부터 해야 되나.
일단 어이없게 선 본 얘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 나 선 볼 거 같아. 아니… 사실은 선 봤다.”
“…….”
“…….”
“…뭐 하는 사람인데?”
“변호사… 나이는 좀 있는데 되게 착해 보이더라.”
“나도 착하잖아.”
“아니 그게…”
“아~아. 하긴 난 니네 어머니 좋아하시는 ‘사’자가 아니니까.”
아니, 얘기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오빠.”
“그래, 그래서 언제 결혼할 건데?”
“오빠 왜 이래 정말.”
“아니, 나한테 말도 안하고 선 볼 정도면 얘기 끝났잖아.변호사고 너 좋아하는 착한 사람이래매.”
“뭘 그거 가지고 그래… 그리고…”
“야, ‘그거 가지고’라니! 너 전엔… 너 선 얘기만 나와도 펄쩍 뛰면서 나한테 전화했었잖아.
“오, 오빠 그게…”
내가 선 보러 나간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갔다가 엉겁결에 만나게 된 것 뿐인데… 숨기고 선 보러 나간 게 아닌데…
난 단지 우리 앞일을 얘기해 보자는 거란 말이야.
“왜, 서른 가까워지니까 앞날 걱정되든?!”
“…오빠 이럼 나 정말 화낸다.”
듣다 보니까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이 사람 오늘 왜 이래?
“너 말야. 좀 솔직해져 봐라. 나 슬슬 떠보지만 말구.”
“정말…”
점점 가관이다. 이안 오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무언가 딱딱한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느낌.
지금 나의 딱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난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나 힘든 거 알잖아!”
“……”
실망감과 분함이 뒤섞여, 얼굴로 치받쳐 오른다.
조금만 더 얘기하다가는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어쨌거나, 선 때려치고 나만 볼 생각 아니면 나한테 전화하지마.”
“…진심이야?”
“내가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 그래. 알았어. 안녕.”
…그 날,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
……
잠깐 냉각기를 가져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못 만나고 있던 친구들(특히 결혼한 애들)하고도 만나보고.
주말에는 내 시간도 가져보고.
이안 오빠 싫어하는 백화점도 오래오래 돌아보고.
앞날에 대한 생각도 좀 더 해 보고…….
…이안 오빠가 전화해올 때까지.
……
오빠랑 연락 끊어진 지 한 달쯤 된 어느 토요일.
가을부터 계속되고 있는, 고된 주말 업무가 끝났다.
잠시 혼자 남아 파일을 정리하다 나와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다. 이런, 우산도 없는데.
오늘 같은 날은 지하주차장 하나 없는 회사 건물이 원망스럽다. 근 100미터를 비 맞고 걸어가야 되나?
“혜경씨.”
“…아.”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남자가 날 부른다.
또 만났네. 현재 상황을 가져온 문제의 남성. 원흉. 박변호사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예… 뭐 그저 그렇죠.”
사실은 댁 때문에 남친이랑 엄한 상황에 빠져 있답니다. 어휴.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세요?”
“그게, 공교롭게도 근처에 올 일이 있었는데요. 이거…”
“……?”
큰 우산 하나를 들어 보이는 변호사 아저씨.
“…혹시 우산이 필요하신 것이 아닌가 해서.”
“아,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 바로 받아서 쓰고 나왔다.
“…어엇?! 아니, 혜경씨. 저도 차를 멀리 대 놓았는데… 좀 같이 씁시다.”
“어, 하나 뿐이에요? 같이 쓰긴 싫은데…”
“에이, 그러지 마시고.”
“…….”
……
주차해놓은 곳도 같은 듯 한데 혼자 쓰고 가기 미안해서 그냥 같이 썼다.
그래도 안전거리는 나름대로 유지해 주고 있으니 다행이다.
말없이 걷기도 참 어색하군.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는데, 앞 건물 멀티비전의 뉴스가 보인다.
((청소년 성매매 명단 공개 / 교수, 의사, 법조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 여럿…))
법조인이 원조교제라.
“저기, 해보신 적 있으세요? 청소년 성매매.”
“…무슨 대답을 기대하십니까? 하하…”
말없이 걷기 어색해서 물어본 건데, 생각해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다.
해 봤어도 ‘예’라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 범죄인 모양인데.
“아니, 그냥… 한 번 해보고 싶다든가. 상상이라든가.”
“음… 전 그런 위험부담이 가는 일은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
썰렁한 얘기를 하면서 무사히 차 앞까지 왔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안 젖었어요.”
“뭘요.”
“…공치사 안 하시네요? 보답으로 밥 사라든가 술 사라든가.”
“그건 혜경씨가 결정하실 문제지 제가 요구할 것은 아닙니다.”
음, 깔끔한데.
“사실 밥 사기엔 좀 약하죠. 이거.”
“…….”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저기, 혜경씨.”
“네…?”
“요즘 혹시….”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뭔가 망설인다.
“……?”
“…아니, 됐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우산을 몇 번 접었다 펴더니 다시 받쳐 든다.
“부담 갖지 마시고, 언제라도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가령 우산이 필요하다든지.”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고려해 보죠.”
“하하 뭐,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는 젖은 한 쪽 어깨를 툭툭 털더니, 자기 차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
또 그 다음 주가 정신 없이 지나가, 어느덧 금요일이 끝나간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금요일 저녁은 우울하다.
그런데 출근 안 하더라도 별로 할 일이 없는 상황은 더 우울하다.
문득, 이안 오빠가 보고 싶어진다. 이 남자 진짜 언제까지 전화 안 하려나?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와 있었다.
“언제 왔어요? 얘기도 없이.”
“방금 왔다. 너랑 얘기 좀 하려구. 근데 꽤 일찍 들어오네?”
코트를 벗어 걸으며 무심히 엄마의 말을 받았다.
“퇴근하고 밥만 먹고 바로 들어오면 이렇지 뭐.”
“금요일 저녁에 그냥 들어와?”
“낼도 출근해야 되잖어. 사람들 만나기도 피곤하고.”
“너 요새 네 남자친구 걔는 안 만나니?”
“요즘은. 근데 잠깐만 안 보는 것 뿐이야.”
“아주 잘됐다. 아주 이번 기회에 걔랑 끊고 박변호사랑 잘 해 보렴.”
솔직하게 말했는데, 괜한 얘기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올해 내내 듣던 비슷한 얘기를 듣겠군.
“이안 오빠랑 헤어진 거 아니라니까...”
“…걔는 언제쯤에나 밥벌이 한대니?”
“박사 마치려면 몇 년쯤 더…”
“아유, 그거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다. 마치면, 그럼 바로 교수 된대?”
“…….”
“얘, 인생 별로 길지 않단다. 너 지금 시집 갈 수 있을 때 가야 돼…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살 거야? 그리고, 걔랑 그 고생해서 나중에 무슨 영화를 보려고 그러니?”
“…꼭 시집가서 팔자 고쳐야 되는 건 아니잖아.”
“으이그 답답한 것. 죽은 네 언니 봐라. 남편이 모자라서 힘들게 직장 다니다가 결국 그리 됐잖니. 김서방이 능력이 좋아서 걔가 집에서 살림만 했거나 맘 편히 일만 했으면 그렇게 됐겠냐구…?!”
“…….”
“모름지기 사내가 됐으면 지 식구는 벌어 먹여야지 않겠어? 너 그 힘든 영화사 일 언제까지 계속할 건데…!”
“…엄마 그만해요 좀.”
……
대충 차 마시고 나서 쉬고 있는데, 엄마가 다시 정색을 하며 말을 건다.
“얘, 너 말이야…”
“엄마, 또 그 얘기 하려구?”
“아이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가 용모가 부족하니 학벌이 딸리니.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안되니?”
“아휴 엄마…….”
“혜경아, 혜숙이 그렇게 가고 난 이 마당에 우리집 딸은 너 하나뿐이다. 니네 아빠랑 내가 바라볼 자식 너 하나 남았는데, 좀 편하게 살아주면 안되겠니?”
“…….”
“안정된 집에 시집 제 때 가서, 이쁜 손주들도 안겨 주고…”
“…엄마, 나 내일도 회사 나가야 되거든? 빨랑 자자….”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엄마의 이야기를 끊고, 불을 껐다.
하지만 이후 잠들지 못해 계속해서 뒤척인 것은 내 쪽이었다.
……
“정혜경씨, 오늘 진짜 왜 이래? 이런 뻔한 걸 착각하고.”
“…죄송합니다.”
“지금 토요일에 출근했다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나랑 딴 사람들도 다 하는 거잖아.”
“아, 아닙니다.”
어이없는 실수… 여론조사 보고서 두 개에 들어가는 일부 자료를 바꿔서 작성해 버렸다.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느끼한 팀장의 잔소리는 꽤나 길 것 같다.
“어제 회식도 저녁만 먹고 후딱 들어갔으면서 3차까지 간 사람들보다 정신이 없으면 어떡해? 응?!”
“…….”
“이딴 식으로 회사 생활할 거면… 아, 관두지. 빨랑 수정해서 제출해.”
“…예.”
…이후,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보고서를 수정했다.
……
“…아.”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왠지 모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 소변기들… 어쩐지 넓다 했더니 남자 화장실이네. 처음 와 본다.
…나 오늘 진짜 맛 갔나봐.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나가야…
“어어, 그렇다니까. 씨발 밥맛이야.”
…이건?
좌변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김팀장이다.
누군가와 통화중인 것 같다. 일보면서 전화하다니 취미도 참.
“좀 이쁘장해서 봐 줬더니만, 요새 개판칠려구 하는 것 같아. 어.”
응…?
“오늘도 어디 정신이 팔렸는지 정신 없더라구. 응? 아, 조용히 한마디 하긴 했는데.”
내 얘기인가.
다른 사람들한테 뒷담화를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내가 잘못했던 건가.
“몰라. 얼굴값 한다고, 저러다 한 놈 물어서 시집 가겠지.”
…야비한 자식.
어디다 전화하는지는 잘 몰라도, 부하직원을 그딴 식으로 말해서 기쁜가?
“어? 야야, 못 먹었다. 아직은. 하하. 남친 있다고 열라 튕기거든.”
…뭐?
뭐?!
……
“어, 팀장님, 옷이 젖으셨네요.”
“아아, 세수하다가 좀 잘못해서.”
내가 사무실로 돌아온 다음, 팀장이 몇 분쯤 뒤에 물에 젖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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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된 거지.
눈 앞의 물체가 흐릿하게 떠오르다 서서히 또렷해진다.
보이는 것은 큰 창문.
창 밖으론, 어제 내린 눈이 쌓였는지 온통 흰색으로 덮여 있는 거리가 보인다.
매우… 생경한 풍경이다.
다시 눈을 감자, 오래 지나지 않은 지난 일들이 갑자기 스쳐 지나간다.
그래, 그건 지난 9월 어느 날 저녁의 일에서부터…
……
……
……
“…실례합니다만, 정혜경씨죠?”
“네? 그런데요…?”
고개를 드니 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말쑥한 차림의 남자.
나이는 한 30대 중반 정도 되려나.
“안녕하세요. 오늘 뵙기로 한 박수현입니다.”
“절… 만나기로 하셨다구요?”
“예, 어머니한테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엄마랑 같이 나온 건데요. 지금 잠시 화장실에… 아.”
…이런. 그랬던 건가.
이런 식으로 선 자리에 끌어내다니.
가방 챙겨 가시길래 화장이라도 고치시려는 건가 했더니만… 그냥 집에 가버렸을지도.
남자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고 내 앞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갑자기 장소를 바꾸셔서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꾼 건 아니지만 말이죠.”
무슨 일로 엄마가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가 했더니, 결국 이거였나.
호텔 라운지로 나오라는 걸, 귀찮아서 회사 근처 커피빈으로 가겠다고 하고 끊었었다.
엄마도 꽤나 당황했겠지만 지금 나만큼은 아니겠지.
지금 그냥 이 자리를 떠버려도 내 책임은 아니다. 그래…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네…? 아…뭐, 고맙습니다.”
내 사진도 보고 왔나 보다. 하긴 그러니까 날 알아볼 수 있었겠지.
이거 왠지 굉장히 짜증이 난다.
그게, 왠지 몰카를 찍힌 느낌이랄까. 난 전혀 모르는 상대방에게 내 정보가 넘어가 있다는 것.
“저기,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오셨나요?”
“음… 여러 가지요. 이름 정혜경. 27세. A여대 졸업, 영화기획사 ‘가을’ 근무…”
“스물여덟인데요. 줄여주셔서 고맙긴 하지만…”
“아, 보통 인적사항은 만 나이로 이야기하니까요.”
“그런가요.”
뭐야 이 사람.
“또 양친 다 계시고, 2녀 중 차녀.”
“…지금은 외동딸이지만요.”
“아, 죄송합니다.”
“아녜요. 벌써 1년 다 되어가는데요 뭐. 그게 다인가요?”
“뭐 그렇죠.”
“뒷조사를 당한 것 같아 찜찜한데요. 뭔가 불공평한 느낌도 들고.”
“아, 이 모든 정보들은 혜경씨 어머니께서 넘겨주신 것이고, 원하시면 제 정보도 아낌없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사실 별로 안 궁금한데…”
“안 궁금하세요? 허허, 이걸 어쩌나.”
“…….”
“…….”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그는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괜히 내가 미안해져서 말을 잇는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성함이…?”
“박수현입니다.”
“박수현씨는 뭐하는 분이세요?”
“변호사요.”
“음… 그랬군요. 또요.”
“35세. B대 법대 졸업, 로펌 K&K 소속, 2남 1녀 중 장남…”
“잠깐만요, 역시 만 나이인가요?”
“예.”
“꽤 늦게까지 결혼 안 하셨네요. 사시 합격한 다음에 여자들이 줄을 서지 않던가요?”
“그다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요.”
“…줄섰던 건 맞나 보네요.”
“하하,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가 멋적은 듯이 웃는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웃는 걸 보니 순박해 보이긴 하군.
……
이것저것 부담 없이 얘기하다 보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이안 오빠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분명 8시 정각. 이쯤에서 태클을 걸어야겠다.
“아까 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중요한 게 한 가지 빠진 게 있더군요.”
“뭡니까?”
“제가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거요.”
“아… 그렇습니까.”
그가 약간 표정이 변했다. 오늘 처음으로 보이는 당황스런 표정이다.
왠지 모를 희열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친다. 하하하.
“선보는 자리에서 실례인 줄은 알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아, 아닙니다. 혜경씨가 알고 나오신 자리도 아닌 것 같으니까요.”
예의바른 대답. 생각보다 매너 있군.
그건 그렇고 이 남자, 금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회복이 굉장히 빠른데.
“…그럼 전 그만 일어나 볼게요. 제 엄만 화장실이 아니라 집에 가신 듯 하니…”
“혜경씨.”
“네?”
난 빈 커피컵을 들고 일어서다 만 엉거주춤한 상태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분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네…?”
“아, 제 말은, 지금 사귀신다는 그 분과 결혼 계획이 잡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아… 그건…”
오빠가 나랑 결혼?
우리가 그런 얘기를 했었던가?
그 동안 숱한 맞선 자리를 거절하면서도, 우린 정작 그 쪽으론 자세하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오늘 즐거웠구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모른 채 서 있는 내게, 그는 미소를 띄우며 명함을 내밀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왠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
“엄마, 도대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 어떻디? 괜찮지?!”
“아휴, 엄마, 말도 안 하고 그럼 어떻게 해?! 나 황당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야.”
“얘, 엄마가 물었으면 대답 좀 해 봐라. 어떻드냐고…?”
“엄마 내가 먼저 물었잖아…! 아휴 나 못살아…”
“아니 너 선 얘기만 나오면 펄쩍 뛰니까 그랬지…! 너 혹시 그냥 나왔니?!”
“아니… 어떻게 그냥 나와. 한 한 시간 정도 얘기했어.”
“꼴랑 한 시간? 그래, 박변호사 사람 괜찮아 보이지 않든?”
“아 몰라... 끊어요.”
…엄마한테 전화하고 나니까 더 짜증이 난다.
……
이안 오빠는 스타벅스 2층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오빠….”
“아, 왔어? 나가자.”
“아니, 잠깐만 앉았다 가자. 아휴, 오늘… 근데 그거 무슨 책이야? ”
“으응, ‘연금술사’라는 책. 왜?”
“오빠가 전공과 관련 없는 책 보는 거 첨 보는 것 같아서.”
“…그랬던가.”
보통은 묵직한 하드커버나 복사물을 들고 있었지.
“가끔은 문학작품도 읽어줘야 할 것 같아서. 항상 논리적으로 따지고만 드니까 감성이 메말라가는 것 같아.”
“아하….”
“이래 보여도 고등학교 때까진 문학소년이었다니까.”
그는 작고 앙증맞은 책을 들었다 놓으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이거 말야. 시작이 굉장히 웃겨. 오스카 와일드 판 나르시스 이야기를 인용했는데…”
자아도취 미소년 나르시스가 빠져 죽은 뒷이야기.
그가 자신을 비춰보다가 몸을 던져 죽은 호수가 나르시스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호수 역시 나르시스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얘기.
진짜 오스카 와일드가 그 얘길 썼는지는 몰라도 좌우간 지독한 독설이다.
“결국은 다들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산다는 얘기겠지.”
“…그럴까.”
아아, 오빠 설명이나 분석을 듣다 보면 문학작품마저도 과학적이야.
“근데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오랜만에 혜경이 보니까 참 좋다. 하하.”
이 사람은 오늘의 내 행위를 어떻게 분석할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애정 어린 그의 눈빛을 받다 보니, 왠지 맞선 얘기를 하기가 싫어지기도 했고.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 어차피 그 사람 다시 볼 것도 아닌데.
……
대충 저녁을 먹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9월 중순의 가을 밤은 왠지 쌀쌀하니 기분이 좋다.
“아니 오늘도 회사 다녀왔다고? 토요일 원래 놀지 않았어?”
“요즘 좀 바쁘잖아. 아마 한동안은 계속 토요일 출근할 거 같애.
…그래도 오늘은 점심때쯤 끝났어. 낼은 놀아.”
“그럼… 오늘 내 방에 가지 않을래?”
“응?”
오올, 슬쩍 지나가는 식으로 유혹하는데. 딴 데 보면서.
…설마 아직도 그런 말 하기가 민망한가?
하긴 오빠 방에 가본지도 꽤 된 것 같다. 올해 긴 소매 옷 입게 된 이후론 안 갔던가.
“내일 출근 안 하니까, 자구 가라.”
“글쎄… 어떻게 할까…?”
“어….”
“좀 피곤하기도 하고…”
“요즘 우리, 자주 못 봤잖아.”
내가 짐짓 딴청을 피우자 내 쪽을 다급하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
…후후, 빨개졌다. 빨개졌다.
내가 못 살아….
“아~아, 불쌍해서 한 번 들러드려야겠네요.”
“헤헤, 잘 생각했어.”
“어디서 케잌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괜찮아. 안 사가도.”
어, 웬일이야? 케잌 매니아가…
……
“난 조금 있다가 들어갈까?”
“아니, 괜찮아. 들어와.”
이안 오빠는 망설임 없이 그의 원룸 문을 열었다.
환기가 잘 된, 정돈된 방이 우릴 맞았다.
“호… 오늘 나 초대할 작정을 하고 있었네… 깔끔하게 청소까지 해놓구.”
“아니, 나 원래 깔끔하잖아.”
“원래 깔끔하다고 해도 수준이 다른걸. 이건 또 뭔가...”
식탁 위에 놓인 케잌이 바로 눈에 띄었다. 딸기인가.
“진짜 단단히 준비한 거 아냐? 히힛… 나 안온다구 그랬으면 울었겠네~.”
“쳇, 그래 맞다. 그래서 싫어?”
“아니.”
난 몸을 돌려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너무 좋아….”
“혜경아… 음…우웁…”
언제나 그는 나의 포로였다… 내 입술이 그와 한번 엉킨 후엔.
……
……
“음! 으음! 아! 아! 아~!!”
“헉…헉헉… 허억…”
그는 내가 위에 올라오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뭐, 나도 싫진 않다.
내 밑에 깔린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몽롱한 상태...
…나도 오늘따라 느낌이 빨리 온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엎드려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빠 눈 떠봐. 나 좀 보면서 해줘…”
“아… 어어, 오랜만이라 좀 자극이 심해서…”
“정말…?”
“응, 허억…?!”
내가 갑자기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가 짧게 신음을 내지른다.
“하, 하아…! 아! 아! 아…”
“혜, 혜경아 나 이제….”
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나의 엉덩이를 부여잡고 밑에서 강하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하으응…”
“으윽…!!!”
순간 경직되며 부르르 떨리는 그의 몸.
따뜻한 기운이 하반신을 타고 전해진다.
……
“뭐야, 케잌도 안 먹구선. 무드도 없이.”
“그러길래 누가 들어오자마자 키스하래…?”
“어, 내 책임이라는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땀에 흠뻑 젖은 알몸으로, 그와 나는 한동안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먹고 싶어?”
“응?”
“식탁 위에 있는 케잌.”
“음… 글쎄. 자긴 아직 좀 이르잖아.”
“그럼 이거 입어.”
그는 옷장을 열어, 자신의 하얀 와이셔츠 한 장을 건네주었다.
“발가벗고 커피 마시기는 좀 그렇지?”
“그러네…”
……
와아, 예쁜 딸기 무스 케잌…
역시 케잌 매니아다. 어디서 산 건지, 맛도 각별한 걸.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문득 커피잔을 들고 가만히 날 바라보는 그가 신경쓰였다.
“오빠 안 먹어?”
“아니, 난 이 쪽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그는 가만히 잔을 놓고 곁으로 다가와, 내 입술에 묻은 케잌을 핥았다.
“우음… 오, 오빳~!”
“…후후, 달구만.”
그는 한참을 그렇게 내 입을 가지고 놀았다.
내 입술과 입 속에 더 이상 케잌의 흔적이 남지 않을 때까지.
어느새 다시 상기된 얼굴로, 그는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오빠, 또 해…?”
“사실 이 셔츠, 단추가 잘 풀어지거든.”
“아이 참…”
…결국 그날 밤, 우리가 잠든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
그로부터 열흘쯤 뒤.
엄마랑 만나기로 했다. 그 때 얘기도 할 겸.
그런데…
“아니 엄마 지금 어디야? 백화점 앞에서 7시에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이구 얘,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깜박했구나. 곧 나가마.”
엄마가 준비해서 여기까지 오시려면 아마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으아… 읽을 책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기엔 짧은 시간이다.
친구들한테 전화질이나 해 볼까... 한 시간 동안?
일단 자리를 옮겨야지. 여긴 너무 시끄럽다.
“어…”
“어머나.”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웬 남자가 눈 앞에 서 있다.
이 낯익은 얼굴은 분명 지난번에 선보러 나왔던 변호사 아저씨.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글쎄요. 전 엄마 만나러 나왔지만… 설마, 저 보러 나오신 건 아니겠죠?”
“…예?”
“…저희 어머니랑 또 연락이 되셨다던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날 이후 그가 몇 번인가 전화를 남겼지만, 연락하진 않았었다.
만약 지난번과 같은 패턴이라면 진짜 용납할 수 없다.
“아, 아닙니다. 전 오늘 진짜 다른 일로 여기 나온 겁니다. 친구가 밥을 사기로 해서…”
“…정말이에요?”
“8층에서 파는 비빔밥, 정말 맛있던데요.”
그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부인한다.
으음. 아니었나.
“…그렇다고 해도 저랑 우연히 마주쳤다는 데는 동의하기 힘든데요. 이렇게 구석에 있었는데.”
“아, 사실 밥 먹고 나오다가 혜경씨가 보이길래 이 쪽으로 나온 건 맞습니다.”
“……에.”
“혜경씨처럼 이쁜 여자는 사실 좀 눈에 잘 띄어서….”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뭐야, 꽤 솔직하잖아.
…아니, 서툰 작업인가??
“누구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아, 어머니라고 하셨죠.”
“네, 한참 뒤에나 오실 것 같지만 말이죠.”
앗, 나도 몰래 푸념을 해 버렸다.
“늦으시나 보군요. 음… 공교롭게도 저도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빕니다만.”
“…….”
“괜찮으시다면 2층 카페에서 같이 기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기 심심할 텐데, 뭐 말동무나 해 줄까.
……
“…그렇게 해서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아, 지루하시죠?”
“아, 아뇨. 재미있어요. 진짜.”
“그거 다행입니다. 휴.”
진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그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권위적인 것 같지도 않고.
법조계 사람들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 조금은 깨졌을지도.
그가 시계를 흘끔 본다.
“어머니 오실 때가 다 된 것 같군요.”
“그러네요.”
“자리를 뜨기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뭔데요?”
편안히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한다.
“지난번에 드린 말씀의 연속입니다만….”
“…….”
“…지금 만나는 분과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뭐라고 해야 될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이미 ‘네’라고 말하기엔 공백이 너무 길어져 버렸어.
“그, 글쎄요.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그렇습니까?”
“전 굳이 빨리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또… 저기, 맞선 분위기를 조장하시면 부담스럽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변호사 아저씨.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혜경씨 어머니께선 다르게 생각하고 계신 듯 해서요.”
“…….”
“사실 저도 끌려가듯 결혼하는 건 절대 반대입니다.”
그가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빨리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있진 않았겠죠.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염두엔 두고 있어서, 나름대로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
“만약에 진지해지신다면, 저란 사람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란 얘기죠.”
화를 내어야 하는 건가? 지금 자기한테 시집오란 얘기 맞지?
그런데, 워낙 조심스럽고 어정쩡한 말투라 어떻게 화를 내야 할 지도 애매하다.
난감해하고 있는 나를 남겨두고 그가 먼저 일어선다.
“또 뵙죠. 아, 맞선 분위기 나는 얘긴 다음부턴 안 할 겁니다. 그럼...”
……
원래 엄마한테 맞선 관련해서 따질 예정이었는데,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서 아무 말 못했다.
혼자 집에 돌아오는 동안, 무심히 들었던 변호사 아저씨의 한 마디가 머리 속을 계속 맴돈다.
(…지금 만나는 분과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그런 얘기 못하고 그냥 잤었지.
이안 오빠랑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
“가끔은 오빠가 먼저 전화해 주면 안돼?”
“아니, 지금 선생님하고 일 얘기를 하다 늦어서…”
“됐어, 정말.”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안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답답한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빠 공부 언제 끝나는데?”
“너 알면서 왜 또 이래… 나 이제 박사 1년차잖아.”
“…….”
“무슨 일 있지? 간단하게 말해 봐.”
무슨 얘기부터 해야 되나.
일단 어이없게 선 본 얘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 나 선 볼 거 같아. 아니… 사실은 선 봤다.”
“…….”
“…….”
“…뭐 하는 사람인데?”
“변호사… 나이는 좀 있는데 되게 착해 보이더라.”
“나도 착하잖아.”
“아니 그게…”
“아~아. 하긴 난 니네 어머니 좋아하시는 ‘사’자가 아니니까.”
아니, 얘기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오빠.”
“그래, 그래서 언제 결혼할 건데?”
“오빠 왜 이래 정말.”
“아니, 나한테 말도 안하고 선 볼 정도면 얘기 끝났잖아.변호사고 너 좋아하는 착한 사람이래매.”
“뭘 그거 가지고 그래… 그리고…”
“야, ‘그거 가지고’라니! 너 전엔… 너 선 얘기만 나와도 펄쩍 뛰면서 나한테 전화했었잖아.
“오, 오빠 그게…”
내가 선 보러 나간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갔다가 엉겁결에 만나게 된 것 뿐인데… 숨기고 선 보러 나간 게 아닌데…
난 단지 우리 앞일을 얘기해 보자는 거란 말이야.
“왜, 서른 가까워지니까 앞날 걱정되든?!”
“…오빠 이럼 나 정말 화낸다.”
듣다 보니까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이 사람 오늘 왜 이래?
“너 말야. 좀 솔직해져 봐라. 나 슬슬 떠보지만 말구.”
“정말…”
점점 가관이다. 이안 오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무언가 딱딱한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느낌.
지금 나의 딱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난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나 힘든 거 알잖아!”
“……”
실망감과 분함이 뒤섞여, 얼굴로 치받쳐 오른다.
조금만 더 얘기하다가는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어쨌거나, 선 때려치고 나만 볼 생각 아니면 나한테 전화하지마.”
“…진심이야?”
“내가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 그래. 알았어. 안녕.”
…그 날,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
……
잠깐 냉각기를 가져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못 만나고 있던 친구들(특히 결혼한 애들)하고도 만나보고.
주말에는 내 시간도 가져보고.
이안 오빠 싫어하는 백화점도 오래오래 돌아보고.
앞날에 대한 생각도 좀 더 해 보고…….
…이안 오빠가 전화해올 때까지.
……
오빠랑 연락 끊어진 지 한 달쯤 된 어느 토요일.
가을부터 계속되고 있는, 고된 주말 업무가 끝났다.
잠시 혼자 남아 파일을 정리하다 나와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다. 이런, 우산도 없는데.
오늘 같은 날은 지하주차장 하나 없는 회사 건물이 원망스럽다. 근 100미터를 비 맞고 걸어가야 되나?
“혜경씨.”
“…아.”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남자가 날 부른다.
또 만났네. 현재 상황을 가져온 문제의 남성. 원흉. 박변호사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예… 뭐 그저 그렇죠.”
사실은 댁 때문에 남친이랑 엄한 상황에 빠져 있답니다. 어휴.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세요?”
“그게, 공교롭게도 근처에 올 일이 있었는데요. 이거…”
“……?”
큰 우산 하나를 들어 보이는 변호사 아저씨.
“…혹시 우산이 필요하신 것이 아닌가 해서.”
“아,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 바로 받아서 쓰고 나왔다.
“…어엇?! 아니, 혜경씨. 저도 차를 멀리 대 놓았는데… 좀 같이 씁시다.”
“어, 하나 뿐이에요? 같이 쓰긴 싫은데…”
“에이, 그러지 마시고.”
“…….”
……
주차해놓은 곳도 같은 듯 한데 혼자 쓰고 가기 미안해서 그냥 같이 썼다.
그래도 안전거리는 나름대로 유지해 주고 있으니 다행이다.
말없이 걷기도 참 어색하군.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는데, 앞 건물 멀티비전의 뉴스가 보인다.
((청소년 성매매 명단 공개 / 교수, 의사, 법조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 여럿…))
법조인이 원조교제라.
“저기, 해보신 적 있으세요? 청소년 성매매.”
“…무슨 대답을 기대하십니까? 하하…”
말없이 걷기 어색해서 물어본 건데, 생각해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다.
해 봤어도 ‘예’라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 범죄인 모양인데.
“아니, 그냥… 한 번 해보고 싶다든가. 상상이라든가.”
“음… 전 그런 위험부담이 가는 일은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
썰렁한 얘기를 하면서 무사히 차 앞까지 왔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안 젖었어요.”
“뭘요.”
“…공치사 안 하시네요? 보답으로 밥 사라든가 술 사라든가.”
“그건 혜경씨가 결정하실 문제지 제가 요구할 것은 아닙니다.”
음, 깔끔한데.
“사실 밥 사기엔 좀 약하죠. 이거.”
“…….”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저기, 혜경씨.”
“네…?”
“요즘 혹시….”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뭔가 망설인다.
“……?”
“…아니, 됐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우산을 몇 번 접었다 펴더니 다시 받쳐 든다.
“부담 갖지 마시고, 언제라도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가령 우산이 필요하다든지.”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고려해 보죠.”
“하하 뭐,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는 젖은 한 쪽 어깨를 툭툭 털더니, 자기 차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
또 그 다음 주가 정신 없이 지나가, 어느덧 금요일이 끝나간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금요일 저녁은 우울하다.
그런데 출근 안 하더라도 별로 할 일이 없는 상황은 더 우울하다.
문득, 이안 오빠가 보고 싶어진다. 이 남자 진짜 언제까지 전화 안 하려나?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와 있었다.
“언제 왔어요? 얘기도 없이.”
“방금 왔다. 너랑 얘기 좀 하려구. 근데 꽤 일찍 들어오네?”
코트를 벗어 걸으며 무심히 엄마의 말을 받았다.
“퇴근하고 밥만 먹고 바로 들어오면 이렇지 뭐.”
“금요일 저녁에 그냥 들어와?”
“낼도 출근해야 되잖어. 사람들 만나기도 피곤하고.”
“너 요새 네 남자친구 걔는 안 만나니?”
“요즘은. 근데 잠깐만 안 보는 것 뿐이야.”
“아주 잘됐다. 아주 이번 기회에 걔랑 끊고 박변호사랑 잘 해 보렴.”
솔직하게 말했는데, 괜한 얘기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올해 내내 듣던 비슷한 얘기를 듣겠군.
“이안 오빠랑 헤어진 거 아니라니까...”
“…걔는 언제쯤에나 밥벌이 한대니?”
“박사 마치려면 몇 년쯤 더…”
“아유, 그거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다. 마치면, 그럼 바로 교수 된대?”
“…….”
“얘, 인생 별로 길지 않단다. 너 지금 시집 갈 수 있을 때 가야 돼…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살 거야? 그리고, 걔랑 그 고생해서 나중에 무슨 영화를 보려고 그러니?”
“…꼭 시집가서 팔자 고쳐야 되는 건 아니잖아.”
“으이그 답답한 것. 죽은 네 언니 봐라. 남편이 모자라서 힘들게 직장 다니다가 결국 그리 됐잖니. 김서방이 능력이 좋아서 걔가 집에서 살림만 했거나 맘 편히 일만 했으면 그렇게 됐겠냐구…?!”
“…….”
“모름지기 사내가 됐으면 지 식구는 벌어 먹여야지 않겠어? 너 그 힘든 영화사 일 언제까지 계속할 건데…!”
“…엄마 그만해요 좀.”
……
대충 차 마시고 나서 쉬고 있는데, 엄마가 다시 정색을 하며 말을 건다.
“얘, 너 말이야…”
“엄마, 또 그 얘기 하려구?”
“아이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가 용모가 부족하니 학벌이 딸리니.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안되니?”
“아휴 엄마…….”
“혜경아, 혜숙이 그렇게 가고 난 이 마당에 우리집 딸은 너 하나뿐이다. 니네 아빠랑 내가 바라볼 자식 너 하나 남았는데, 좀 편하게 살아주면 안되겠니?”
“…….”
“안정된 집에 시집 제 때 가서, 이쁜 손주들도 안겨 주고…”
“…엄마, 나 내일도 회사 나가야 되거든? 빨랑 자자….”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엄마의 이야기를 끊고, 불을 껐다.
하지만 이후 잠들지 못해 계속해서 뒤척인 것은 내 쪽이었다.
……
“정혜경씨, 오늘 진짜 왜 이래? 이런 뻔한 걸 착각하고.”
“…죄송합니다.”
“지금 토요일에 출근했다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나랑 딴 사람들도 다 하는 거잖아.”
“아, 아닙니다.”
어이없는 실수… 여론조사 보고서 두 개에 들어가는 일부 자료를 바꿔서 작성해 버렸다.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느끼한 팀장의 잔소리는 꽤나 길 것 같다.
“어제 회식도 저녁만 먹고 후딱 들어갔으면서 3차까지 간 사람들보다 정신이 없으면 어떡해? 응?!”
“…….”
“이딴 식으로 회사 생활할 거면… 아, 관두지. 빨랑 수정해서 제출해.”
“…예.”
…이후,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보고서를 수정했다.
……
“…아.”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왠지 모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 소변기들… 어쩐지 넓다 했더니 남자 화장실이네. 처음 와 본다.
…나 오늘 진짜 맛 갔나봐.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나가야…
“어어, 그렇다니까. 씨발 밥맛이야.”
…이건?
좌변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김팀장이다.
누군가와 통화중인 것 같다. 일보면서 전화하다니 취미도 참.
“좀 이쁘장해서 봐 줬더니만, 요새 개판칠려구 하는 것 같아. 어.”
응…?
“오늘도 어디 정신이 팔렸는지 정신 없더라구. 응? 아, 조용히 한마디 하긴 했는데.”
내 얘기인가.
다른 사람들한테 뒷담화를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내가 잘못했던 건가.
“몰라. 얼굴값 한다고, 저러다 한 놈 물어서 시집 가겠지.”
…야비한 자식.
어디다 전화하는지는 잘 몰라도, 부하직원을 그딴 식으로 말해서 기쁜가?
“어? 야야, 못 먹었다. 아직은. 하하. 남친 있다고 열라 튕기거든.”
…뭐?
뭐?!
……
“어, 팀장님, 옷이 젖으셨네요.”
“아아, 세수하다가 좀 잘못해서.”
내가 사무실로 돌아온 다음, 팀장이 몇 분쯤 뒤에 물에 젖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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