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2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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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누르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데리고 다니기 창피한 현재 남자 친구와 있는데 예전 남자 친구와 마주친 기분이었다.
실제로 이 변호사가 내 남자 친구는 아니지만, 같은 팀인 이상 그의 허물조차 내 몫처럼 느껴졌다.
이 변호사도, 정지헌도, 같이 있으면 정신이 괴로운 사람들일 뿐이다. 얼추 설명은 끝났고, 남은 휴식 시간은 혼자서 쉬고 싶었다.
조용히 공실을 빠져나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들고 2층 난간에 기대섰다.
1층 로비로 헐레벌떡 커피를 들고 뛰어오는 이 변호사가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이번에 잡은 호구는 쟤야?”
그래서 다가오는 지헌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헌은 친한 척 내게 몸을 밀착시키며 턱으로 1층에 있는 이 변호사를 가리켰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뭐?”
“이번 호구는 저 새끼냐고.”
“하….”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지헌은 내 귀에 대고 이죽거렸다.
“근데 너 줄 제대로 잡은 거 맞아? 지금 네가 쟤 뒤치다꺼리해 주게 생겼는데.”
“관심 꺼.”
“사임하라고 말했을 텐데. 여기서 더 성적 안 좋아지면 이직할 곳도 없을걸. 언제까지 로컬에서 노동력 착취당하고 뺑이 칠 거야.”
“쓸데없는 충고 고마워. 근데 난 이 사건 흥미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영 승산이 없진 않더라. 너희는 심신 상실로 밀고 간다며. 말이 많은 거 보면 꽤 무서운가 봐? 우린 잃을 거 없어. 어차피 독박 쓰게 생겼는데 뭔들 못 할까.”
“그래? 그럼 나랑 더럽게 엮이는 수밖에.”
지헌은 한순간에 가면을 벗고 상스러운 민낯을 보였다. 낮게 뇌까리는 말에는 어떤 악의적인 의도가 느껴졌다.
“무척 새삼스럽네.”
이미 정지헌과는 한번 더럽게 엮인 인연이었다. 나는 빈정거리며 시비조로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법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엮인다’의 진짜 의미는 곧 알게 되었다.
지헌은 사소한 건수로 민사를 걸고, 우리가 신청하는 증거마다 신빙성이 없다고 물고 늘어졌다. 시간을 질질 끌고 의뢰인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원래 음흉하고 집착적인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첫 민사 재판에서 서면으로 개처럼 싸우고 난 직후였다.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더럽고 거친 플레이에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굳은 얼굴로 서류를 챙기는데 지헌이 탁자에 기대며 슬쩍 말을 걸어왔다.
“뭐 해.”
나는 서류를 탁, 책상에 내려치며 냉랭히 답했다.
“보면 알잖아.”
“얼굴 좀 풀지 그래.”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지헌의 훼방으로 결정적인 증거 신청이 배제당했다. 다양한 분야의 변호사가 포진해 있는 중형 로펌에서 군단으로 밀어붙이니 우리 쪽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이번 공격은 간신히 방어했지만, 다음 재판은 장담 못 했다. 넘겨받은 공을 토스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는 게임이었다.
멀리서 이 변호사가 판사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걸어왔다. 표정이 꽤 좋아 보였다. 그는 지헌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내게 말했다.
“다행히 기일 연기 가능하대.”
“정말요?”
저절로 밝은 목소리가 나왔다. 조사할 시간이 촉박했는데 다행히 다음 기일로 연기되었다.
판사가 연수원 선배라고 자신 있어 하기에 고작 그 정도 인연이면 재판 걸리는 판사마다 인연 아닌 사람은 없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래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기일 연기는 딱히 특혜랄 건 없지만, 어쨌든 판사에게 밉보이면 불가능한 일인 건 맞으니까.
일 처리를 부드럽게 하는 것도 재주라고 재판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간만에 이 변호사에게 산뜻하게 웃어 주었다.
이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헌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다 정 변호사님 덕분입니다.”
재판이 끝나고 셋이서 판사실로 들어가더니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인간이 남 좋은 일을 할 리가 없는데. 저 인간은 열 개를 얻기 위해 한 개를 양보하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로서 별 뾰족한 수도 없으니까….
나는 애써 석연찮은 기분을 털어 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정지헌과 엮이면 기분이 찝찝하다.
“별말씀을요.”
지헌은 여유롭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곤 이 변호사가 가방을 챙기는 틈에 슬쩍 내게 몸을 기울였다.
“다른 새끼 보고는 잘만 웃으면서.”
나오던 웃음이 도로 사그라들었다. 변호인석으로 돌아가는 지헌을 보며 나는 길게 탄식했다.
진짜 볼 때마다 시비 걸면서 사람 속을 긁어 대는데 욕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대학 때는 그래도 사람 눈치 봐 가며 자료 갖고 은근슬쩍 괴롭히더니, 이제는 아주 대놓고 갈구고 있었다.
불행은 지헌은 내 치부를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갈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정지헌 앞에서 무방비한 모습을 많이 보였고, 내 직감에 지헌은 아직 본격적으로 복수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많이 벼르고 있는 느낌인데 그게 어떤 돌발 행동으로 튀어나올지 몰라서 사람을 긴장시켰다.
언젠가 한 번쯤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그냥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은 느낌.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고, 그땐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재회할 때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절대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지헌 변호사하고 동기 아냐?”
“…맞아요.”
“근데 별로 안 친한가 봐?”
이 변호사 눈에도 날을 세우는 우리가 보였던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 왔다.
“학생 수가 워낙 많으니까요.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였어요.”
“아무리 상대 로펌이라도 그렇게 척질 거 뭐 있어. 서로서로 도와 가며 사는 거지.”
이 변호사는 남의 속도 모르고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나는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정지헌과 그 옆에 붙어 있는 여자를 곁눈질했다.
둘은 바짝 붙어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지헌은 여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다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공부할 때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져 마음이 복잡했다.
“이거는 왜 안 냈어?”
“네?”
상념에 빠져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이 변호사가 준비해 놓은 서류를 가리켰다. 혹시 몰라서 준비는 해 놓았지만 막판에 제출하지 않은 증거였다.
“저쪽에서도 이걸 갖고 있으면요? 그럼 우리 일관성만 흔들려요. 이제 와서 무리예요.”
상대가 무슨 패를 가졌는지 모를 땐 내 패를 신중히 내야 했다. 초기 진술을 번복하는 증거는 아무리 이로운 것이라도 제출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지헌도 아마 그 점을 노리고 전략적으로 패를 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지헌이라면 우리 쪽이 실수하도록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 이건 상황 봐서 내지 뭐.”
이 변호사는 서류를 다시 가방에 챙겨 넣었다.
“사무실에 들어갈 거지?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아뇨. 오늘 라운지 사건 다른 피고인 형사 재판 있잖아요. 보고 들어가려고요.”
이 변호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 변호사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손목시계를 잠깐 확인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나도 최 변호사랑 같이 재판이나 보고 갈까?”
나야 경험이 미천한 새끼 변호사니 사건과 관련이 있으면 공부 차원에서 견학하는 거지, 사실 이 변호사가 재판을 볼 이유는 없다. 재판 끝나고 판결 문서만 읽어도 쟁점 파악은 가능하니까.
“시간이 좀 남는데 커피라도 한잔하지.”
그러고는 자기 멋대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한 번 같이 술 한잔한 이후로 이 변호사는 내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이 변호사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지헌은 눈을 낮게 내리깔고 스쳐 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 여자는 여전히 지헌의 옆에 붙어 있다. 재판을 진행하면서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은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지헌의 옆에 있는 여자를 내가 거슬려 할 이유는 없었다. 이 기회에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질척대는 이 변호사도 짜증 나는데, 정지헌까지 가세했다면 더 피곤했을 테니까.
그런데 말끔하지 못한 기분은 왜일까. 내게 관심 없는 지헌을 보며 드는 감정은 웃기게도 질투심이었다. 질투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변한 정지헌이 어색해서 그런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늦은 점심 후 다른 피고인의 형사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국민 참여 재판이었다. 쇼맨십이 능숙한 지헌에게 유리한 재판이라 하여간 끝장나게 운도 좋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느긋하게 청중석에 앉아서 지헌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할까.
재판하다 보면 필수적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판 검사의 주신문이 끝나고 지헌의 반대 신문이 이어졌다. 지헌은 차분한 어조로 논리 정연하게 신문을 이끌어 갔으며, 감성적인 말로 배심원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판사의 모습에서 지헌의 논리에 설득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사는 살짝 격양된 어조로 모순을 잡아냈으나 지헌은 해외 판례까지 가져와서 제대로 방어했다.
민사에서 정지헌과 만날 때는 내 것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형사 변호인석에 선 지헌은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였다. 내가 알고 있는 변호사들 중에 정지헌보다 더 변호사다운 사람은 없었다.
열띤 분위기 속에 잠시 휴식 시간이 되었다. 이 변호사가 대학 동기라며 판사와 잠시 인사하러 간 사이 지헌이 쓱 내게 몸을 기울였다.
“심미안이 참 후졌어. 그새 아저씨 취향으로 바뀐 거야?”
또 시작이다. 재판 내내 눈길도 주지 않더니 빈정거리는 말투로 재판의 여운을 사정없이 깨트렸다.
괜찮다 싶으면 사정없이 분위기를 깨 버리는 건 대학 때와 똑같다. 아니, 대학 때 같았으면 단박에 둘이 잤겠지. 상스럽게 추궁하고 밤새도록 사람 들들 볶았을 텐데, 지금은 그나마 수준이 높아진 건가.
나는 지헌에게 몸을 기울이고 낮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의 여자까지 탐내는 너만 하겠어. 불륜보다는 낫지 않아?”
언젠가 다이어리에서 본 지헌과 선배 여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어디서 들은 소리야?”
높은 언성에 사람들 이목이 쏠렸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입구 쪽에 서 있던 경비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으로 오려는 몸짓을 보였다.
나는 지헌을 노려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여 서류를 뒤적였다. 훅, 하고 숨을 내쉰 지헌은 같이 서류 보는 척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네가 나한테 지적할 주제나 돼? 더 심하게 말하지 않는 건 옛정을 생각해서가 아니야. 내 입 더럽히기 싫어서 그런 거지.”
예전 일은 우리 둘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고, 그걸 화두로 삼는 건 위험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홱 등을 돌렸다.
“왜 또 분위기가 안 좋아.”
조그만 소란에 판사와 면담을 끝낸 이 변호사가 다가왔다. 나는 모른 척 서류만 뒤적이다가 착석하는 판사를 보며 작게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더 봐야지 뭐.”
“배심원들은 넘어간 것 같은데요.”
“배심원들이야 참고 사항 정도니까.”
말로는 낙관하면서 이 변호사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지헌이 맡은 피고인이 빠져나가면 자동적으로 우리 측 의뢰인이 독박으로 뒤집어쓰게 생겼다.
주범이 안 되면 공범으로라도 정지헌의 의뢰인을 물고 늘어져야 했다. 낮게 대화를 나누다가 재판 재개를 알리는 소리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증인을 신청합니다.”
차분히 말하는 지헌에게서 감정의 흐트러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전 여자 친구 이야기로 감정을 자극해서 평정심을 깨트리려는 작전은 실패였다.
예전보다는 감정 조절이 능숙해 보이는 모습에 그래도 나이를 먹고 변한 게 있긴 하구나, 싶었다.
판사의 허락이 떨어지고 지헌네 로펌 쪽 사람이 증인을 데려왔다. 피고인 친구의 어머니라는데, 20대 초반의 아들을 둔 어머니치고는 상당히 젊어 보였다.
자신 있는 지헌의 얼굴을 보니까, 저 여자가 오늘의 히든카드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미리 지헌에게 코치받은 듯 모범 답을 줄줄 읊으며 피고인의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누가 준비한 증언자인데 어련하겠어.
조금 지루한 얼굴로 여자의 증언을 듣고 있을 때였다. 고개를 돌리는 여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으로 말을 더듬었다.
“음, 그러니까…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피고인 이성범 씨가 그날 전화를 했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지헌은 노련하게 여자의 증언을 도와주었다.
“예, 그래서… 그날 전화가 와서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제야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슨히 앉아 있던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무언가 어렴풋이 기억날 듯 말 듯 했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여자도 느낀 듯 점차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리고 여자가 무심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흘끔 쳐다본 순간, 번득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새벽녘에 우연히 마주쳐 내게 명함을 건네준 여자였다.
내가 여자를 알아봤음을 여자도 눈치챈 듯했다. 눈에 띄게 불안정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판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여자를 눈여겨보았다. 지헌은 여자의 변화를 눈치채고 급히 증언을 끝마쳤다.
술집 일을 권유하던 여자가 왜 거기 앉아 있는지, 어떻게 고상한 사모님이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약점이 있는 사람을 재판정에 증인으로 들여보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헌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하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정지헌이래도 과거를 세탁한 여자를 어떻게 알았겠어.
지헌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나 구경할 여유도 없이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증인에 대한 사실을 쪽지에 적어 검사에게 살짝 전해 주었다. 신뢰감이 생명인 형사 재판에서는 치명적인 증언자였다. 지헌이 그 모습을 포착하고 날 선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순간 여유로운 가면이 벗겨지고 거친 싸움꾼의 눈빛이 드러났다. 동물적인 감으로 판세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하여간 촉은 좋다니까. 그러니 여태 재판에서 승승장구해 왔겠지만. 그런 정지헌도 이제 끝이다.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지헌에게 보기 좋은 미소를 날리고 유유히 재판정을 빠져나왔다.
다시 판을 짜기 위해 법원 공실에서 급히 추가 증거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공실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예정보다 훨씬 빨랐다. 직감적으로 정지헌이 망했음을 알았다.
지헌은 공실에 들어서자마자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직선으로 내게 걸어왔다. 꽤 열받은 얼굴이었다.
'와, 무서워 죽겠네.'
곁눈질로 다가오는 지헌을 주시하며 느리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긴 지헌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겠지. 검사에게 한 방 먹은 얼굴이 궁금하고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는지 구경하고 싶었는데, 뒤늦게 아쉬웠다.
가까이 다가온 지헌은 탁자를 두 손으로 짚고 위협적으로 눈을 맞추었다. 나는 모니터를 슬쩍 접으며 시비조로 대꾸했다.
“뭐.”
“불륜 아냐.”
한바탕 말싸움할 각오에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목소리가 위로 튀었다.
“뭐?”
지헌은 단호히 말했다.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불륜 아니라고.”
“…….”
“신입생 때 우연히 만났고, 약혼자 있으면서 날 만났다는 걸 알고 바로 헤어졌어. 당연히 깊은 관계도 아니었고.”
지헌은 재차 강조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은 상관없어. 굳이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이미 오래전, 나와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저 내 취향을 걸고넘어지기에, 지헌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마침 떠오른 걸 언급한 것뿐, 굳이 진지하게 해명하는 지헌이 이해 안 되었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지헌은 묘하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니 대뜸 시비를 걸었다.
“증인으로 올라온 여자. 그 여자 남편, 방청석에 있었던 거 알아?”
나는 뻔뻔하게 답했다.
“나야 모르지.”
“머리 잘 굴렸네. 일부러 형사에서 터트린 거지? 한 가정을 파탄 낸 심정이 어때?”
정지헌이 형사에서 망한 이상 나와 붙은 민사 재판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여자와 나의 접점을 모르는 정지헌은 일부러 내가 지헌의 형사 재판을 작심하고 망쳤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받아쳤다.
“의뢰인이 살인범이라는 걸 알면서 상대방의 결정적 증거에 대해 증거 배제 신청한 심정은 어때? 판사와 연줄 있다고 증거 채택 두 번씩 혜택받는 심정은? 내 증인이 진실을 말한다는 걸 알면서 신빙성 떨어진다고 증거 흠집 내는 심정은? 네가 날 비난할 자격이 있어? 변호사는 살인범을 길가에 돌아다니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라고 언론에 버젓이 떠들어 놓고.”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살인범에게도 절차적 정당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했지.”
지헌이 서슬 돋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거나 그거나. 고상한 척 돌려 말한 거지. 한 가정을 파탄 낸 심정? 나 그런 거 눈 하나 깜짝 안 해. 그러니까 내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
서로 사이좋게 치고받는데 이 변호사가 다가왔다.
“왜 또 분위기가 안 좋아. 둘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네.”
“…….”
“그나저나 최 변호사 대단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나한테 미리 말 좀 해 주지. 나도 놀랐잖아. 정 변호사도 이번에 식은땀 좀 흘렸지 아마?”
우리는 사나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이 변호사는 이어지는 침묵에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재판이 있다고 급히 자리를 피했다.
지헌은 뒤늦게 뭔가 이상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어떻게 알았지?”
“…지금이 몇 시야. 바빠서 나도 이만 가 봐야겠네.”
지헌의 눈길을 피하며 분주히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지헌은 노트북을 탁, 덮으며 책상을 짚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잇새로 낮게 속삭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말해. 너 저 여자 어떻게 알았는지.”
“이 변호사 말 못 들었어? 조사해서 알았어. 나 혼자 터트리려고 비밀로 한 거야.”
“그래? 그럼 이상현 변호사 데리고 그 여자한테 찾아가서 물어봐도 되겠지? 너랑 무슨 사이냐고.”
“…….”
“알았어. 그 여자한테 물어보지.”
지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지헌이 이 변호사를 부르려고 할 때 급히 지헌을 붙들었다.
“잠깐만!”
지헌은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지헌을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그걸 꼭 알아야겠어?”
“말해.”
단호한 얼굴에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학 때 우리 옆집에 살았어. 나한테 명함 주더라. 생각 있으면 와서 일하라고.”
“뭐?”
지헌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너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빛에 나오려던 말이 도로 들어갔다.
“그래서.”
되묻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낮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지헌은 무슨 눈치를 챈 것인지 거칠게 내게 달려들었다.
“어디, 계속 말해 봐.”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 굳이 상처를 파헤치는 심정을 이해 못 하겠다. 거기에 조금 반발심이 치밀었고 어차피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관계, 이젠 될 대로 돼라 싶었다.
나는 오기 어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마침 네가 나타나서 너한테 갔어. 여자가 준 명함이나 너나, 나한테는 그게 그거였어. 아무거나 잡아서 벗어나고 싶었거든. 나는 널 선택한 게 아니야. 너밖에 잡을 패가 없었어.”
지헌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옥죄였다.
“너 주우면 내가 더 불쌍해진다고 했지? 네 말이 맞았어. 너 같은 쓰레기한테 내 진심을 바치는 게 아니었어. 죽도록 후회해. 넌 그럴 가치도 없는 애였어.”
지헌은 씹어뱉듯 말을 내뱉고 거칠게 돌아섰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지헌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는구나.
이렇게 최악으로.
이젠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삐져나왔다.
법정에서 지헌을 엿 먹이려 노력했지만, 이런 식으로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지헌을 흔들고 싶진 않았다.
그냥 나에게 화가 났다. 일부러 못된 말을 퍼붓고 돌아서서 마음 불편해하고. 다시 만나서도 엇나가는 내가 징그러웠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언론 인터뷰를 한 정지헌의 사진이 띄워져 있다. 인터뷰는 최근 일어난 범죄에 대한 법률 전문가로서의 견해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헌은 형사 재판의 패배로 민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더니 결국 절반의 승리를 이뤄 냈다. 형사에서 망했는데 민사에서 그 정도로 살아남다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지헌의 증인을 끌어내렸지만, 다음에는 그런 행운이 오지 않을 테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우리 처지에서는 중대형 로펌을 상대로 싸운 것치고 잘 진 재판이었다. 그저 흔한 재판인데 그 뒤에 돌아온 일상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예전보다 정지헌 생각이 자주 났고 그 끝은 늘 ‘쓰레기’라는 단어로 마무리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뒤집혔다. 자책하고 후회하고 차라리 이렇게 끝나서 잘됐다고 후련해하고.
사람의 관계란 정말 이상해서 일단 한번 관계가 형성되면 관성의 법칙처럼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었다.
다시 만나도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관계가 지긋지긋했고,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도 지겨웠다.
어차피 우리는 평생 어긋나기만 할 인연이다. 분명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나는 또 정지헌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자책하고 후회하고 후련해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침에 걸려 온 전화가 그 발단이었다. 지헌의 로펌에 있는 학교 선배였다. 학교 다닐 때 건너 건너 얼굴만 알지 딱히 큰 친분은 없었던 선배인지라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미희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네, 선배 오랜만이에요. 로펌 쪽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나도 너 얼마 전에 재판 끝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정말 축하해.”
“아니에요, 저희가 패소했어요.”
“그래도 부분 승리했잖아. 그게 어디야. 솔직히 우리는 너희 완전 패소할 줄 알았거든.”
“네….”
“내가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미희 너 우리 로펌으로 올래? 원래 들어오려던 어소 자리가 취소돼서 자리가 하나 남거든. 너 재판한 걸 대표님이 좋게 보셨나 봐.”
“저를요?”
“ 어. 정지헌 변호사도 널 적극 추천하더라고.”
“정지헌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 왜 그럴 리가 없어. 너 이번에 걔 물 먹였다며.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말을 흐렸다. 선배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대학 때부터 너 눈여겨봤어. 공부 욕심 있고, 똑 부러지고. 소수파 지지하면서 그렇게 심도 있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거든.”
“…….”
“지금 다니는 로펌, 별로 마음에 안 들지? 이쪽으로 옮기면 일하는 폭도 더 넓어질 거야. 한번 생각해 봐.”
얼떨결에 면접 약속을 잡고 믿기지 않아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정지헌 생각이 났고 가슴이 요동쳤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쿵쾅거리는 가슴 위에 지그시 손을 얹었다.
가슴이 뛰는데, 그게 드디어 꿈에 그리는 자리로 이직하게 돼서인지, 정지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고층 빌딩 숲이 보였다. 정지헌네 로펌은 기업들이 많이 모인 땅값 비싼 동네에 둥지를 트고 있었다.
야트막하고 낡은 건물이 많은 법원 근처와 달리 창밖으로 보이는 고층 빌딩 숲이 생소했다. 대리석 바닥이 깔린 화려한 회의실도 어쩐지 위압감이 들었다.
나는 널찍한 회의 탁자 한가운데 앉아서 벽에 걸린 변호사들 사진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중에는 법원 시보 할 때 스치듯 뵀던 분도 있고, 건너 아는 선배도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정지헌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래도 낯선 환경에서 유일하게 친분 있는 인물이라서 반가웠다. 천천히 정지헌의 약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자동문이 열리고 선배가 들어왔다.
“미안. 의뢰인 상담이 늦게 끝나서. 오래 기다렸지?”
“아뇨. 면접도 방금 끝났어요.”
“어땠어?”
“괜찮았어요.”
이미 내정된 자리인지라 면접은 형식적이었다. 연수원 생활에 대해 조금 묻고, 그동안 맡았던 사건이나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언급한 정도였다.
“여긴 그쪽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아무래도 그렇죠.”
“다루는 사건도 좀 다를 거야. 매니지먼트사하고 계약해서 유명인들 송무도 다루지만, 기업들 자문으로 일할 때가 많거든. 일해 보면 알겠지만 각각 장단점이 있긴 해. 거기서는 주로 송무 위주였지? 어땠어?”
“거의 민사가 대부분이죠. 가사사건이나 형사도 조금 했고요. 자문은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회사들 간단한 노무 업무 하고 계약서 검토나 형사 고발 되는 사건들 위주로 했어요. HR(human resources) 컨설팅도 많이 하던데 전 그쪽은 잘 안 맞더라고요.”
“법 체질이라 그렇지 뭐.”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사람들은 HR이 안 맞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 판례에 구속되어 사고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HR은 법대 출신보다는 타 과 출신들이 강세였다.
“아무튼 여기서 두루 경험해 보고 네가 관심 있는 쪽으로 특화했으면 좋겠다.”
“네.”
“그리고 오자마자 일 얘기 해서 미안한데, 당장 다음 주에 투입해야 할 사건이 있어. 어, 마침 정 변호사 왔네.”
선배가 내 뒤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 파일을 든 정지헌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머지는 정 변호사가 설명해 줄 거야. 미안한데, 난 오후 재판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오늘 고마웠어요, 선배.”
“그래, 다음에 정식으로 출근하면 보자.”
선배는 바쁜 듯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지헌은 들어오자마자 서류를 내 앞에 툭 던져 놓고 창가에 섰다.
조용한 회의실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고 웅, 하고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쓰레기라고 욕을 퍼부은 이후로 첫 만남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느슨해졌던 몸이 다시 긴장되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의 방해로 형사 재판에서 망한 정지헌은 민사 재판 선고일에 사무장님만 보내고 나타나지 않았다.
나를 외면한 채 굳건히 돌아선 등이 그래도 반갑고 조금은 서운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당한 채로 호락호락 넘어갈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경계하는 마음도 있었다. 마냥 미안하다고 해서 편하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얼마 전 재미있는 사건이 들어왔어.”
지헌이 돌아서며 흥미로운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뉴스에서 들어 봤지? 연예인 이유림 사건.”
얼마 전 남자 친구와 법적 공방으로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눈앞의 파일로 시선을 내렸다. 수사 기록과 간단한 사건 개요가 있었다.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데 지헌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자는 남자와 사귀면서 지속해서 후원을 받았어. 그 대신 성관계를 이어 왔고. 근데 헤어지고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사기죄로 억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한 거야.”
“…….”
“사귀는 동안 남자가 지불한 돈이 핵심인데, 어떻게 생각해?”
“…….”
“스폰일까 아니면 단순한 연인 사이의 지원일까?”
지헌은 느긋이 나를 돌아보며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에 대한 농락을 담고 있었다. 나는 파일을 내려놓고 정색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만해.”
“뭘?”
“너 지금 사건 얘기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나 엿 먹이고 싶은 거잖아.”
“난 단순히 네 법률적인 견해가 궁금할 뿐이야.”
“너 나한테 복수하고 싶지. 그래서 나 뽑은 거지? 나 괴롭히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너한테 복수를? 전혀.”
책상을 짚은 지헌이 내게 몸을 숙이고 가까이 눈을 맞추었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단단한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나는 손안의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지헌은 위협하듯 내게 다가오며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넌 우리 관계가 스폰이었다고 생각해?”
“더는 너랑 같이 못 있겠어.”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지헌은 자꾸만 나를 궁지로 몰아가 심리적으로 폭발하게 만들었다.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돌리는데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날아왔다.
“앉아. 거기서 문 열고 나가면 넌 영원히 끝이야.”
“…….”
손잡이를 움켜쥔 손이 멈칫했다. 현재 정지헌은 내 목숨 줄을 틀어쥐고 있었다. 명백한 권력의 차이를 느끼며 주먹을 꾹 쥐고 결국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지헌은 고분고분한 나를 보며 입술 끝을 올렸다. 내게 미치는 본인의 영향력이 몹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앞으로 지헌과 같이 일하는 날들의 예고편을 본 기분이라 벌써 피곤했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응시하며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 법률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여자에게 결혼 의사가 있었다고 밀고 나갈 생각이야. 내심의 의사니까 입증은 어렵겠지만 해 볼 만해. 상대 쪽도 여자의 기망(欺罔) 의사를 입증시켜야 하는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스폰과 사귀는 사이의 지원이란 게 사실 애매한 문제거든. 남자가 지불한 돈이 대가성을 가졌는지가 중요한데 성관계 없이도 만남이 이어졌다고 주장할게.”
“법정에서 그 말이 통할까? 억이 넘는 돈이 오고 갔는데?”
“믿게 만들어야지.”
“그런 사이에 진짜 사랑이 가능할 거 같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네 경험담이야?”
“부탁인데, 일할 때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마.”
“좋아.”
지헌은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그 정도면 만족한 듯 걸터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폰으로 밝혀지면 검찰에서는 성매매로 추가 기소 들어올 거야. 무조건 민사로 끝내야 돼. 일단 증인 연습부터 시켜.”
“재판이 언제야?”
“다음 달.”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파일을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그러곤 지헌을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했다.
“다 끝났으면 나 이제 가도 되지?”
일부러 고분고분한 척 지헌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헌은 그 정도 반항은 우습다는 듯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가 봐.”
인사도 없이 쌩하게 일어나서 문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우뚝 멈춰서 돌아섰다. 그러곤 진지하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근데 앞으로도 너 이런 식이면 나 같이 일 못 해.”
“이런 식?”
지헌이 날카로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발끈한 얼굴이 어처구니가 없다.
재회한 이후로 볼 때마다 온갖 방법으로 내게 이죽거리고 신경을 긁어내렸다.
앞으로 내내 이런 식으로 부딪힐 걸 생각하면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오르는 것 같다. 나도 날을 세웠다.
“사사건건 시비잖아. 나한테 감정 섞지 마.”
“일에 개인적인 감정 섞는 건 너지. 왜 이 여자에게 감정 이입 하는 거야?”
지겨워. 또다시 원점이었다. 나는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굳이 내 대답을 듣고 싶다면. 그래, 말해 줄게.”
“…….”
“너한테 많이 의지했고, 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너한테 끌렸어.”
“…….”
“근데 너한테 본격적으로 원조받으면서, 내가 네 요구를 거절한 적 있었어?”
지헌에게 끌렸던 것도 사실이고 원조받으면서 성관계 없이는 만남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게 내 마음에 우울을 만들었다.
지헌에 대한 열등감과 자존심과 성공하고 싶은 욕망으로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던 마음은 나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지우고 싶고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자꾸만 파헤치는 지헌을 이해할 수가 없고 그런 그에게 화가 났다.
“이 정도 답변이면 충분하니?”
지헌을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거칠게 돌아섰다.
지헌이 떠나고 나는 마음 기댈 곳이 없어서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한 건 지헌이 유학 가고 다시는 지헌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난 후였다.
공부하면서 내내 언젠가는 한 번쯤 만날 것으로 믿었고, 그땐 예전과 다르게 정말 잘 끝맺고 싶었다.
결국 이렇게 또다시 엉망진창으로 되어 버렸지만….
“상대방이 어떤 방법으로 방어할 것 같습니까?”
“…….”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은?”
“…….”
“대답해 보세요. 최미희 변호사님.”
회의실에 앉아 있는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생각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직접 증거는 없지만….”
“없지만?”
박선호가 얄밉게 말꼬리를 잡았다.
“다른 사실로 추정할 생각입니다.”
못 미더운 듯 박선호가 다시 반문했다.
“판례는요?”
“하급심에 유사 판례가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전략이란 게 없네. 이대로 나가면 박살 나지.”
다리를 꼬고 앉은 박선호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내가 밤새워 작성한 변론 조서 초안을 툭 책상 위로 던졌다.
그 옆에 앉은 정지헌은 내내 무료한 얼굴로 내가 당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나는 잠자코 서류만 내려다보았다.
어제 퇴근하면서 박선호가 아침까지 자기 책상 위에 갖다 두라고 지시한 문서였다.
일부러 엿 먹이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신입인 새끼 변호사 주제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족한 시간 탓에 조서는 허술했다.
박선호는 남자 인턴이 만든 조서와 조목조목 비교하며 내 조서를 깎아내렸다.
“이거 인턴보다 못해서야, 원.”
쯧, 혀를 차는데 무척이나 얄미웠다.
인턴이 작성한 조서는 도저히 초보의 실력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인턴에게는 미리 과제를 알려 주고 첨삭까지 해 준 게 분명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엿 먹이려는 작전이라면 아주 대성공이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여자가 들어왔다. 법정에서 정지헌 옆에 붙어 있던 비서였다.
“차 드시고 하세요.”
사람 수대로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온 여자는 상큼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파트너 비서인 그녀는 주로 정지헌과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헌은 여자가 들어서자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건네받았다. 별로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데 저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게 뭐라고 조금 충격이었다.
“뜨거운데 왜 혼자 들고 와.”
“감사합니다.”
여자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듯 민망한 얼굴로 살짝 웃어 보였다.
지헌은 여자에게 빨대를 챙겨 주고 여자에게 휴지가 필요하다 싶으면 찾기 전에 먼저 가져다주었다. 대화하면서도 지헌의 신경은 내내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눈길 한 톨 주지 않으면서 여자만 챙겼다.
이후 회의는 엉망진창이었다.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는 듯 작정하고 몰아붙이는 박선호에게 제대로 한 번 반박해 보지도 못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잘못 데려온 거 아니냐, 쟤 낙하산이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머릿속으로는 지헌이 여자를 신경 쓰고 챙겨 주는 장면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굳이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저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으면서 거기에 신경 쓰는 내가 이상했다.
서류를 챙겨 들고 뒤늦게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투명한 유리로 지어진 휴게실에서 여자가 정지헌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도에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박선호가 심술궂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엿 먹였으면 됐지, 또 무슨 볼일이 남았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박선호는 시선을 휴게실에 향한 채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너 지금까지 남자들 쥐락펴락하면서 인생 편하게 살아왔지.”
“뭐?”
“남자들 다 너한테 슬슬 기잖아. 근데 난 어림없어. 네가 무슨 꿍꿍이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난 지헌이처럼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거야.”
“…….”
“앞으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여기서 뛰쳐나가게 만들 테니까.”
적개심이 대단하네. 어디를 가든 괴롭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선전 포고하는 인간은 또 처음이었다.
대학 때 딱히 존재감도 없었고, 나와 대화 한번 해 보지 않은 인간이 내게 이럴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헌에게 가진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어 냈다. 이직한 첫 주부터 참 인상 깊은 환영식이다.
휴게실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데스크로 발길을 돌렸다. 데스크 자리는 비어 있고 살짝 열린 준비실 틈으로 직원들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송국에서 정지헌 변호사님 찾는 전화 또 왔다며?”
“거절해도 자꾸 오네. 변호사님 그런 소개팅 프로그램 싫어하신다니까.”
“한동안 결혼 정보 회사에서 그렇게 오더니 이제는 방송국에서 오네. 그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알고 오는지 몰라.”
“근데 변호사님 여자 친구 있지 않아? 연예인인지 모델인지 한동안 변호사님 방에 들락거린 여자 있었잖아.”
“자기 혼자 열 올린 거지, 뭐. 법조계 집안에서 뭐가 아쉬워서 연예인을 만나겠어.”
정지헌 집안이 법조계였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냥 막연히 있는 집 자식이겠거니 생각했지, 딱히 궁금해한 적은 없다. 그러고 보니 언뜻 듣긴 했던 것 같은데, 그 당시는 워낙 지헌에게 관심이 없어서 뇌리에 남아 있는 정보가 없다.
그 이후로도 직원들의 대화를 통해 지헌의 여성 편력은 종종 귀에 들어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특성상 지헌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재력가 집안에서 맞선이 들어오고, 결혼 정보 회사에서도 줄기차게 전화가 오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여자가 있고.
그때마다 마음이 이상했다. 돈 많고 잘생겼으니 당연히 여자가 있겠지. 대학 때도 따르는 여자는 많았으니까. 오히려 여자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과거의 지헌은 내게 병적으로 집착해서 문제였지, 적어도 다른 여자에게 곁눈질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처음 보는 지헌의 모습이 어색해서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대책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니까. 진짜 말도 안 돼.
나는 황망한 얼굴로 연신 중얼거렸다.
빨간 줄이 변론 조서 위로 사정없이 그어졌다. 줄이 늘어날수록 지헌은 미간을 심하게 구겼다.
나는 지헌의 책상 옆에 두 손 잡고 서서 처참하게 해부되는 문서를 지켜보았다. 며칠 전 회의 이후 다시 작성한 문서였다.
증거도 부족하고 의뢰인도 비협조적인 사건을 외국 판례부터 하급심 판례까지 눈 빠지게 찾아 가며 밤새워 전략 세웠더니 빨간 펜으로 난자하고 있었다.
“너, 나 엿 먹이려고 이래?”
얼굴로 뭔가 날아들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지헌이 채점이 끝난 조서를 눈앞에 모욕적으로 날리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잠자코 책상에 떨어진 조서를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일정이 꼬였다.
평상시처럼 정장 바지를 입으려다가 문득 회의 중 들어온 여자가 생각났다.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예전에 정지헌과 어울릴 때는 나도 치마를 즐겨 입었는데 연수원 생활을 거쳐 변호사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여성성을 드러내는 옷은 멀리했다.
나는 여자와 나를 곱씹으며 비교했다. 지금은 나이에 맞는 얼굴을 찾았지만, 어려서부터 조숙한 이미지로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또래보다 몇 살 더 많게 오해받고는 했다.
그게 은근히 콤플렉스였는데, 우습게도 여자의 어려 보이는 얼굴과 상대적으로 조숙해 보이는 나를 세세히 비교하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옷장을 뒤져서 언젠가 세일할 때 사 두고 입지 않은 치마를 꺼내 입었다.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어쩐지 출근복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도 같고. 오랜만에 입어서 감이 안 왔다. 스커트에 어울리는 블라우스도 이것저것 대보며 고르다가 결국 월요일 아침부터 지각했다.
부랴부랴 서류를 들고 지헌의 방을 찾았다. 지헌은 잔뜩 벼르고 있는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원래대로 입고 출근할 것을 괜히 이거저거 갈아입다가 지각했다. 정말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전 로펌에 있을 때는 재판 때만 단정히 입으려고 신경 쓰는 정도였지, 평상시는 바지에 셔츠만 돌려 입었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해서 월요일 아침부터 일정이 꼬였다고 하기에는 이직한 후로 나는 매일 지헌에게 깨지고 있었다. 지헌은 조서 중간을 볼펜으로 지적했다.
“모른다고 주장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중간에 말 바꿔서 일관성 깨면 어쩌자는 거야.”
“의뢰인이 고집부린 거야. 그건 사건과 관련 없는 증거라고 했지. 괜히 내 봤자 쟁점만 흐리고 나중에 정작 중요한 증거는 못 낸다고. 아니래. 자기는 죽어도 내야겠대. 뭐는 준비 서면에 넣고 뭐는 변론에서 빼라. 아주 자기가 변호사야.”
지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딱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 앞으로도 이럴 거야?”
“뭐가?”
“여기가 학교인 줄 알아? 의뢰인 다루는 것도 변호사 능력이야. 이런 의뢰인 하나 제대로 못 다룰 거면 앞으로 넌 송무에서 빠져.”
지헌은 냉정하게 통보하고 할 말 끝났다는 듯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준비 서면을 작성하는 모양인데 꽤 시끄러웠던 사건이라 연일 뉴스에 나왔던 기억이 난다.
지헌은 사건을 맡으면 법적 이슈를 끌어내고 기념비적인 판결로 대법원 공보에 종종 이름이 실리곤 했다. 공부하면서 지헌의 소식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유였다.
억울하지만 멋있긴 했다.
“뭐 해? 안 나가고.”
“다시 해 볼게.”
열심히 공부하고 형편없는 시험지를 손에 쥐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본다. 오기 어린 음성에 지헌이 슬쩍 눈썹을 추켜세웠다.
나는 지헌의 서류에서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문 앞에는 박선호가 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누가 들으면 내가 정지헌 사무실이 아니라 안방에서 걸어 나오는 줄 알겠다. 지헌과 재회한 날 아파트에서 마주친 후로 부쩍 나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알고 보니 대학 때부터 정지헌 옆에서 우리의 연애사를 다 지켜봤다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볼 때마다 사람을 도끼눈 뜨고 노려보는데 상대하기 귀찮았다.
그런 내 앞을 박선호가 막아섰다.
“사람 말이 안 들려?”
“들리니까 말씀하세요.”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불량하게 답했다.
“오후까지 건물명도소송 관련 판례 찾아서 내 책상 위에 갖다 놔.”
박선호는 찍어 누르듯이 내게 명령했다. 혈압이 쭉 상승한다. 상사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제대로 굴리려나 본데, 내가 너 정지헌 때문에 봐주는 것도 모르고.
“죄송하지만 어렵겠는데요. 변론 보고서 작성해야 합니다.”
“뭐? 이게 아주 신입 주제에 빠져 가지고.”
“어소보다 승소 낮은 파트너 주제에 뭐라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박선호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송무 실력이 형편없는 박선호는 그나마 정지헌 덕분에 파트너로 버티고 있었다. 아무도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었다.
“야! 너 뭐 믿고 이래. 너 정지헌 믿고 이렇게 까불어? 이게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누가 정지헌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네.”
“이게 진짜!”
거친 언성에 벌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지헌은 서늘한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호는 눈에 힘을 풀고 재빨리 지헌에게 가서 붙었다.
“쟤가 먼저 하극상했어.”
고자질하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지헌은 박선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무심히 박선호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고 간단히 사인해서 돌려주었다.
“감정 평가 나올 때까지는 일단 이대로 진행해.”
박선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다가 아 참, 하며 깜박했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손뼉 쳤다.
“의원님과 약속 있는 거 기억하지? 잊지 말고 나가. 의원님 따님도 나오는 자리니까. 의원님이 몇 번이나 네 이야기 하시더라. 사윗감으로 네가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봐.”
“알았으니까 가 봐.”
지헌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는 잔뜩 힘이 들어간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예전에야 지헌을 네 멋대로 흔들었겠지만 이젠 어림도 없다. 이제 지헌은 너와는 급이 다른 인간이다.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의원 따님 운운하며 약속을 상기시킨 것도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내 신경 긁어 놓으려고.
실제로 이 변호사가 내 남자 친구는 아니지만, 같은 팀인 이상 그의 허물조차 내 몫처럼 느껴졌다.
이 변호사도, 정지헌도, 같이 있으면 정신이 괴로운 사람들일 뿐이다. 얼추 설명은 끝났고, 남은 휴식 시간은 혼자서 쉬고 싶었다.
조용히 공실을 빠져나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들고 2층 난간에 기대섰다.
1층 로비로 헐레벌떡 커피를 들고 뛰어오는 이 변호사가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이번에 잡은 호구는 쟤야?”
그래서 다가오는 지헌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헌은 친한 척 내게 몸을 밀착시키며 턱으로 1층에 있는 이 변호사를 가리켰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뭐?”
“이번 호구는 저 새끼냐고.”
“하….”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지헌은 내 귀에 대고 이죽거렸다.
“근데 너 줄 제대로 잡은 거 맞아? 지금 네가 쟤 뒤치다꺼리해 주게 생겼는데.”
“관심 꺼.”
“사임하라고 말했을 텐데. 여기서 더 성적 안 좋아지면 이직할 곳도 없을걸. 언제까지 로컬에서 노동력 착취당하고 뺑이 칠 거야.”
“쓸데없는 충고 고마워. 근데 난 이 사건 흥미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영 승산이 없진 않더라. 너희는 심신 상실로 밀고 간다며. 말이 많은 거 보면 꽤 무서운가 봐? 우린 잃을 거 없어. 어차피 독박 쓰게 생겼는데 뭔들 못 할까.”
“그래? 그럼 나랑 더럽게 엮이는 수밖에.”
지헌은 한순간에 가면을 벗고 상스러운 민낯을 보였다. 낮게 뇌까리는 말에는 어떤 악의적인 의도가 느껴졌다.
“무척 새삼스럽네.”
이미 정지헌과는 한번 더럽게 엮인 인연이었다. 나는 빈정거리며 시비조로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법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엮인다’의 진짜 의미는 곧 알게 되었다.
지헌은 사소한 건수로 민사를 걸고, 우리가 신청하는 증거마다 신빙성이 없다고 물고 늘어졌다. 시간을 질질 끌고 의뢰인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원래 음흉하고 집착적인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첫 민사 재판에서 서면으로 개처럼 싸우고 난 직후였다.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더럽고 거친 플레이에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굳은 얼굴로 서류를 챙기는데 지헌이 탁자에 기대며 슬쩍 말을 걸어왔다.
“뭐 해.”
나는 서류를 탁, 책상에 내려치며 냉랭히 답했다.
“보면 알잖아.”
“얼굴 좀 풀지 그래.”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지헌의 훼방으로 결정적인 증거 신청이 배제당했다. 다양한 분야의 변호사가 포진해 있는 중형 로펌에서 군단으로 밀어붙이니 우리 쪽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이번 공격은 간신히 방어했지만, 다음 재판은 장담 못 했다. 넘겨받은 공을 토스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는 게임이었다.
멀리서 이 변호사가 판사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걸어왔다. 표정이 꽤 좋아 보였다. 그는 지헌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내게 말했다.
“다행히 기일 연기 가능하대.”
“정말요?”
저절로 밝은 목소리가 나왔다. 조사할 시간이 촉박했는데 다행히 다음 기일로 연기되었다.
판사가 연수원 선배라고 자신 있어 하기에 고작 그 정도 인연이면 재판 걸리는 판사마다 인연 아닌 사람은 없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래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기일 연기는 딱히 특혜랄 건 없지만, 어쨌든 판사에게 밉보이면 불가능한 일인 건 맞으니까.
일 처리를 부드럽게 하는 것도 재주라고 재판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간만에 이 변호사에게 산뜻하게 웃어 주었다.
이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헌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다 정 변호사님 덕분입니다.”
재판이 끝나고 셋이서 판사실로 들어가더니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인간이 남 좋은 일을 할 리가 없는데. 저 인간은 열 개를 얻기 위해 한 개를 양보하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로서 별 뾰족한 수도 없으니까….
나는 애써 석연찮은 기분을 털어 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정지헌과 엮이면 기분이 찝찝하다.
“별말씀을요.”
지헌은 여유롭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곤 이 변호사가 가방을 챙기는 틈에 슬쩍 내게 몸을 기울였다.
“다른 새끼 보고는 잘만 웃으면서.”
나오던 웃음이 도로 사그라들었다. 변호인석으로 돌아가는 지헌을 보며 나는 길게 탄식했다.
진짜 볼 때마다 시비 걸면서 사람 속을 긁어 대는데 욕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대학 때는 그래도 사람 눈치 봐 가며 자료 갖고 은근슬쩍 괴롭히더니, 이제는 아주 대놓고 갈구고 있었다.
불행은 지헌은 내 치부를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갈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정지헌 앞에서 무방비한 모습을 많이 보였고, 내 직감에 지헌은 아직 본격적으로 복수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많이 벼르고 있는 느낌인데 그게 어떤 돌발 행동으로 튀어나올지 몰라서 사람을 긴장시켰다.
언젠가 한 번쯤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그냥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은 느낌.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고, 그땐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재회할 때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절대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지헌 변호사하고 동기 아냐?”
“…맞아요.”
“근데 별로 안 친한가 봐?”
이 변호사 눈에도 날을 세우는 우리가 보였던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 왔다.
“학생 수가 워낙 많으니까요.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였어요.”
“아무리 상대 로펌이라도 그렇게 척질 거 뭐 있어. 서로서로 도와 가며 사는 거지.”
이 변호사는 남의 속도 모르고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나는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정지헌과 그 옆에 붙어 있는 여자를 곁눈질했다.
둘은 바짝 붙어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지헌은 여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다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공부할 때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져 마음이 복잡했다.
“이거는 왜 안 냈어?”
“네?”
상념에 빠져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이 변호사가 준비해 놓은 서류를 가리켰다. 혹시 몰라서 준비는 해 놓았지만 막판에 제출하지 않은 증거였다.
“저쪽에서도 이걸 갖고 있으면요? 그럼 우리 일관성만 흔들려요. 이제 와서 무리예요.”
상대가 무슨 패를 가졌는지 모를 땐 내 패를 신중히 내야 했다. 초기 진술을 번복하는 증거는 아무리 이로운 것이라도 제출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지헌도 아마 그 점을 노리고 전략적으로 패를 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지헌이라면 우리 쪽이 실수하도록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 이건 상황 봐서 내지 뭐.”
이 변호사는 서류를 다시 가방에 챙겨 넣었다.
“사무실에 들어갈 거지?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아뇨. 오늘 라운지 사건 다른 피고인 형사 재판 있잖아요. 보고 들어가려고요.”
이 변호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 변호사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손목시계를 잠깐 확인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나도 최 변호사랑 같이 재판이나 보고 갈까?”
나야 경험이 미천한 새끼 변호사니 사건과 관련이 있으면 공부 차원에서 견학하는 거지, 사실 이 변호사가 재판을 볼 이유는 없다. 재판 끝나고 판결 문서만 읽어도 쟁점 파악은 가능하니까.
“시간이 좀 남는데 커피라도 한잔하지.”
그러고는 자기 멋대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한 번 같이 술 한잔한 이후로 이 변호사는 내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이 변호사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지헌은 눈을 낮게 내리깔고 스쳐 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 여자는 여전히 지헌의 옆에 붙어 있다. 재판을 진행하면서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은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지헌의 옆에 있는 여자를 내가 거슬려 할 이유는 없었다. 이 기회에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질척대는 이 변호사도 짜증 나는데, 정지헌까지 가세했다면 더 피곤했을 테니까.
그런데 말끔하지 못한 기분은 왜일까. 내게 관심 없는 지헌을 보며 드는 감정은 웃기게도 질투심이었다. 질투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변한 정지헌이 어색해서 그런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늦은 점심 후 다른 피고인의 형사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국민 참여 재판이었다. 쇼맨십이 능숙한 지헌에게 유리한 재판이라 하여간 끝장나게 운도 좋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느긋하게 청중석에 앉아서 지헌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할까.
재판하다 보면 필수적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판 검사의 주신문이 끝나고 지헌의 반대 신문이 이어졌다. 지헌은 차분한 어조로 논리 정연하게 신문을 이끌어 갔으며, 감성적인 말로 배심원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판사의 모습에서 지헌의 논리에 설득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사는 살짝 격양된 어조로 모순을 잡아냈으나 지헌은 해외 판례까지 가져와서 제대로 방어했다.
민사에서 정지헌과 만날 때는 내 것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형사 변호인석에 선 지헌은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였다. 내가 알고 있는 변호사들 중에 정지헌보다 더 변호사다운 사람은 없었다.
열띤 분위기 속에 잠시 휴식 시간이 되었다. 이 변호사가 대학 동기라며 판사와 잠시 인사하러 간 사이 지헌이 쓱 내게 몸을 기울였다.
“심미안이 참 후졌어. 그새 아저씨 취향으로 바뀐 거야?”
또 시작이다. 재판 내내 눈길도 주지 않더니 빈정거리는 말투로 재판의 여운을 사정없이 깨트렸다.
괜찮다 싶으면 사정없이 분위기를 깨 버리는 건 대학 때와 똑같다. 아니, 대학 때 같았으면 단박에 둘이 잤겠지. 상스럽게 추궁하고 밤새도록 사람 들들 볶았을 텐데, 지금은 그나마 수준이 높아진 건가.
나는 지헌에게 몸을 기울이고 낮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의 여자까지 탐내는 너만 하겠어. 불륜보다는 낫지 않아?”
언젠가 다이어리에서 본 지헌과 선배 여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어디서 들은 소리야?”
높은 언성에 사람들 이목이 쏠렸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입구 쪽에 서 있던 경비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으로 오려는 몸짓을 보였다.
나는 지헌을 노려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여 서류를 뒤적였다. 훅, 하고 숨을 내쉰 지헌은 같이 서류 보는 척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네가 나한테 지적할 주제나 돼? 더 심하게 말하지 않는 건 옛정을 생각해서가 아니야. 내 입 더럽히기 싫어서 그런 거지.”
예전 일은 우리 둘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고, 그걸 화두로 삼는 건 위험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홱 등을 돌렸다.
“왜 또 분위기가 안 좋아.”
조그만 소란에 판사와 면담을 끝낸 이 변호사가 다가왔다. 나는 모른 척 서류만 뒤적이다가 착석하는 판사를 보며 작게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더 봐야지 뭐.”
“배심원들은 넘어간 것 같은데요.”
“배심원들이야 참고 사항 정도니까.”
말로는 낙관하면서 이 변호사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지헌이 맡은 피고인이 빠져나가면 자동적으로 우리 측 의뢰인이 독박으로 뒤집어쓰게 생겼다.
주범이 안 되면 공범으로라도 정지헌의 의뢰인을 물고 늘어져야 했다. 낮게 대화를 나누다가 재판 재개를 알리는 소리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증인을 신청합니다.”
차분히 말하는 지헌에게서 감정의 흐트러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전 여자 친구 이야기로 감정을 자극해서 평정심을 깨트리려는 작전은 실패였다.
예전보다는 감정 조절이 능숙해 보이는 모습에 그래도 나이를 먹고 변한 게 있긴 하구나, 싶었다.
판사의 허락이 떨어지고 지헌네 로펌 쪽 사람이 증인을 데려왔다. 피고인 친구의 어머니라는데, 20대 초반의 아들을 둔 어머니치고는 상당히 젊어 보였다.
자신 있는 지헌의 얼굴을 보니까, 저 여자가 오늘의 히든카드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미리 지헌에게 코치받은 듯 모범 답을 줄줄 읊으며 피고인의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누가 준비한 증언자인데 어련하겠어.
조금 지루한 얼굴로 여자의 증언을 듣고 있을 때였다. 고개를 돌리는 여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으로 말을 더듬었다.
“음, 그러니까…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피고인 이성범 씨가 그날 전화를 했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지헌은 노련하게 여자의 증언을 도와주었다.
“예, 그래서… 그날 전화가 와서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제야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슨히 앉아 있던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무언가 어렴풋이 기억날 듯 말 듯 했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여자도 느낀 듯 점차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리고 여자가 무심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흘끔 쳐다본 순간, 번득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새벽녘에 우연히 마주쳐 내게 명함을 건네준 여자였다.
내가 여자를 알아봤음을 여자도 눈치챈 듯했다. 눈에 띄게 불안정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판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여자를 눈여겨보았다. 지헌은 여자의 변화를 눈치채고 급히 증언을 끝마쳤다.
술집 일을 권유하던 여자가 왜 거기 앉아 있는지, 어떻게 고상한 사모님이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약점이 있는 사람을 재판정에 증인으로 들여보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헌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하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정지헌이래도 과거를 세탁한 여자를 어떻게 알았겠어.
지헌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나 구경할 여유도 없이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증인에 대한 사실을 쪽지에 적어 검사에게 살짝 전해 주었다. 신뢰감이 생명인 형사 재판에서는 치명적인 증언자였다. 지헌이 그 모습을 포착하고 날 선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순간 여유로운 가면이 벗겨지고 거친 싸움꾼의 눈빛이 드러났다. 동물적인 감으로 판세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하여간 촉은 좋다니까. 그러니 여태 재판에서 승승장구해 왔겠지만. 그런 정지헌도 이제 끝이다.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지헌에게 보기 좋은 미소를 날리고 유유히 재판정을 빠져나왔다.
다시 판을 짜기 위해 법원 공실에서 급히 추가 증거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공실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예정보다 훨씬 빨랐다. 직감적으로 정지헌이 망했음을 알았다.
지헌은 공실에 들어서자마자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직선으로 내게 걸어왔다. 꽤 열받은 얼굴이었다.
'와, 무서워 죽겠네.'
곁눈질로 다가오는 지헌을 주시하며 느리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긴 지헌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겠지. 검사에게 한 방 먹은 얼굴이 궁금하고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는지 구경하고 싶었는데, 뒤늦게 아쉬웠다.
가까이 다가온 지헌은 탁자를 두 손으로 짚고 위협적으로 눈을 맞추었다. 나는 모니터를 슬쩍 접으며 시비조로 대꾸했다.
“뭐.”
“불륜 아냐.”
한바탕 말싸움할 각오에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목소리가 위로 튀었다.
“뭐?”
지헌은 단호히 말했다.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불륜 아니라고.”
“…….”
“신입생 때 우연히 만났고, 약혼자 있으면서 날 만났다는 걸 알고 바로 헤어졌어. 당연히 깊은 관계도 아니었고.”
지헌은 재차 강조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은 상관없어. 굳이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이미 오래전, 나와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저 내 취향을 걸고넘어지기에, 지헌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마침 떠오른 걸 언급한 것뿐, 굳이 진지하게 해명하는 지헌이 이해 안 되었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지헌은 묘하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니 대뜸 시비를 걸었다.
“증인으로 올라온 여자. 그 여자 남편, 방청석에 있었던 거 알아?”
나는 뻔뻔하게 답했다.
“나야 모르지.”
“머리 잘 굴렸네. 일부러 형사에서 터트린 거지? 한 가정을 파탄 낸 심정이 어때?”
정지헌이 형사에서 망한 이상 나와 붙은 민사 재판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여자와 나의 접점을 모르는 정지헌은 일부러 내가 지헌의 형사 재판을 작심하고 망쳤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받아쳤다.
“의뢰인이 살인범이라는 걸 알면서 상대방의 결정적 증거에 대해 증거 배제 신청한 심정은 어때? 판사와 연줄 있다고 증거 채택 두 번씩 혜택받는 심정은? 내 증인이 진실을 말한다는 걸 알면서 신빙성 떨어진다고 증거 흠집 내는 심정은? 네가 날 비난할 자격이 있어? 변호사는 살인범을 길가에 돌아다니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라고 언론에 버젓이 떠들어 놓고.”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살인범에게도 절차적 정당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했지.”
지헌이 서슬 돋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거나 그거나. 고상한 척 돌려 말한 거지. 한 가정을 파탄 낸 심정? 나 그런 거 눈 하나 깜짝 안 해. 그러니까 내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
서로 사이좋게 치고받는데 이 변호사가 다가왔다.
“왜 또 분위기가 안 좋아. 둘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네.”
“…….”
“그나저나 최 변호사 대단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나한테 미리 말 좀 해 주지. 나도 놀랐잖아. 정 변호사도 이번에 식은땀 좀 흘렸지 아마?”
우리는 사나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이 변호사는 이어지는 침묵에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재판이 있다고 급히 자리를 피했다.
지헌은 뒤늦게 뭔가 이상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어떻게 알았지?”
“…지금이 몇 시야. 바빠서 나도 이만 가 봐야겠네.”
지헌의 눈길을 피하며 분주히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지헌은 노트북을 탁, 덮으며 책상을 짚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잇새로 낮게 속삭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말해. 너 저 여자 어떻게 알았는지.”
“이 변호사 말 못 들었어? 조사해서 알았어. 나 혼자 터트리려고 비밀로 한 거야.”
“그래? 그럼 이상현 변호사 데리고 그 여자한테 찾아가서 물어봐도 되겠지? 너랑 무슨 사이냐고.”
“…….”
“알았어. 그 여자한테 물어보지.”
지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지헌이 이 변호사를 부르려고 할 때 급히 지헌을 붙들었다.
“잠깐만!”
지헌은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지헌을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그걸 꼭 알아야겠어?”
“말해.”
단호한 얼굴에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학 때 우리 옆집에 살았어. 나한테 명함 주더라. 생각 있으면 와서 일하라고.”
“뭐?”
지헌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너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빛에 나오려던 말이 도로 들어갔다.
“그래서.”
되묻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낮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지헌은 무슨 눈치를 챈 것인지 거칠게 내게 달려들었다.
“어디, 계속 말해 봐.”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 굳이 상처를 파헤치는 심정을 이해 못 하겠다. 거기에 조금 반발심이 치밀었고 어차피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관계, 이젠 될 대로 돼라 싶었다.
나는 오기 어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마침 네가 나타나서 너한테 갔어. 여자가 준 명함이나 너나, 나한테는 그게 그거였어. 아무거나 잡아서 벗어나고 싶었거든. 나는 널 선택한 게 아니야. 너밖에 잡을 패가 없었어.”
지헌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옥죄였다.
“너 주우면 내가 더 불쌍해진다고 했지? 네 말이 맞았어. 너 같은 쓰레기한테 내 진심을 바치는 게 아니었어. 죽도록 후회해. 넌 그럴 가치도 없는 애였어.”
지헌은 씹어뱉듯 말을 내뱉고 거칠게 돌아섰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지헌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는구나.
이렇게 최악으로.
이젠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삐져나왔다.
법정에서 지헌을 엿 먹이려 노력했지만, 이런 식으로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지헌을 흔들고 싶진 않았다.
그냥 나에게 화가 났다. 일부러 못된 말을 퍼붓고 돌아서서 마음 불편해하고. 다시 만나서도 엇나가는 내가 징그러웠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언론 인터뷰를 한 정지헌의 사진이 띄워져 있다. 인터뷰는 최근 일어난 범죄에 대한 법률 전문가로서의 견해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헌은 형사 재판의 패배로 민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더니 결국 절반의 승리를 이뤄 냈다. 형사에서 망했는데 민사에서 그 정도로 살아남다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지헌의 증인을 끌어내렸지만, 다음에는 그런 행운이 오지 않을 테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우리 처지에서는 중대형 로펌을 상대로 싸운 것치고 잘 진 재판이었다. 그저 흔한 재판인데 그 뒤에 돌아온 일상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예전보다 정지헌 생각이 자주 났고 그 끝은 늘 ‘쓰레기’라는 단어로 마무리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뒤집혔다. 자책하고 후회하고 차라리 이렇게 끝나서 잘됐다고 후련해하고.
사람의 관계란 정말 이상해서 일단 한번 관계가 형성되면 관성의 법칙처럼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었다.
다시 만나도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관계가 지긋지긋했고,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도 지겨웠다.
어차피 우리는 평생 어긋나기만 할 인연이다. 분명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나는 또 정지헌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자책하고 후회하고 후련해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침에 걸려 온 전화가 그 발단이었다. 지헌의 로펌에 있는 학교 선배였다. 학교 다닐 때 건너 건너 얼굴만 알지 딱히 큰 친분은 없었던 선배인지라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미희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네, 선배 오랜만이에요. 로펌 쪽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나도 너 얼마 전에 재판 끝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정말 축하해.”
“아니에요, 저희가 패소했어요.”
“그래도 부분 승리했잖아. 그게 어디야. 솔직히 우리는 너희 완전 패소할 줄 알았거든.”
“네….”
“내가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미희 너 우리 로펌으로 올래? 원래 들어오려던 어소 자리가 취소돼서 자리가 하나 남거든. 너 재판한 걸 대표님이 좋게 보셨나 봐.”
“저를요?”
“ 어. 정지헌 변호사도 널 적극 추천하더라고.”
“정지헌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 왜 그럴 리가 없어. 너 이번에 걔 물 먹였다며.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말을 흐렸다. 선배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대학 때부터 너 눈여겨봤어. 공부 욕심 있고, 똑 부러지고. 소수파 지지하면서 그렇게 심도 있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거든.”
“…….”
“지금 다니는 로펌, 별로 마음에 안 들지? 이쪽으로 옮기면 일하는 폭도 더 넓어질 거야. 한번 생각해 봐.”
얼떨결에 면접 약속을 잡고 믿기지 않아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정지헌 생각이 났고 가슴이 요동쳤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쿵쾅거리는 가슴 위에 지그시 손을 얹었다.
가슴이 뛰는데, 그게 드디어 꿈에 그리는 자리로 이직하게 돼서인지, 정지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고층 빌딩 숲이 보였다. 정지헌네 로펌은 기업들이 많이 모인 땅값 비싼 동네에 둥지를 트고 있었다.
야트막하고 낡은 건물이 많은 법원 근처와 달리 창밖으로 보이는 고층 빌딩 숲이 생소했다. 대리석 바닥이 깔린 화려한 회의실도 어쩐지 위압감이 들었다.
나는 널찍한 회의 탁자 한가운데 앉아서 벽에 걸린 변호사들 사진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중에는 법원 시보 할 때 스치듯 뵀던 분도 있고, 건너 아는 선배도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정지헌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래도 낯선 환경에서 유일하게 친분 있는 인물이라서 반가웠다. 천천히 정지헌의 약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자동문이 열리고 선배가 들어왔다.
“미안. 의뢰인 상담이 늦게 끝나서. 오래 기다렸지?”
“아뇨. 면접도 방금 끝났어요.”
“어땠어?”
“괜찮았어요.”
이미 내정된 자리인지라 면접은 형식적이었다. 연수원 생활에 대해 조금 묻고, 그동안 맡았던 사건이나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언급한 정도였다.
“여긴 그쪽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아무래도 그렇죠.”
“다루는 사건도 좀 다를 거야. 매니지먼트사하고 계약해서 유명인들 송무도 다루지만, 기업들 자문으로 일할 때가 많거든. 일해 보면 알겠지만 각각 장단점이 있긴 해. 거기서는 주로 송무 위주였지? 어땠어?”
“거의 민사가 대부분이죠. 가사사건이나 형사도 조금 했고요. 자문은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회사들 간단한 노무 업무 하고 계약서 검토나 형사 고발 되는 사건들 위주로 했어요. HR(human resources) 컨설팅도 많이 하던데 전 그쪽은 잘 안 맞더라고요.”
“법 체질이라 그렇지 뭐.”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사람들은 HR이 안 맞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 판례에 구속되어 사고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HR은 법대 출신보다는 타 과 출신들이 강세였다.
“아무튼 여기서 두루 경험해 보고 네가 관심 있는 쪽으로 특화했으면 좋겠다.”
“네.”
“그리고 오자마자 일 얘기 해서 미안한데, 당장 다음 주에 투입해야 할 사건이 있어. 어, 마침 정 변호사 왔네.”
선배가 내 뒤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 파일을 든 정지헌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머지는 정 변호사가 설명해 줄 거야. 미안한데, 난 오후 재판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오늘 고마웠어요, 선배.”
“그래, 다음에 정식으로 출근하면 보자.”
선배는 바쁜 듯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지헌은 들어오자마자 서류를 내 앞에 툭 던져 놓고 창가에 섰다.
조용한 회의실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고 웅, 하고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쓰레기라고 욕을 퍼부은 이후로 첫 만남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느슨해졌던 몸이 다시 긴장되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의 방해로 형사 재판에서 망한 정지헌은 민사 재판 선고일에 사무장님만 보내고 나타나지 않았다.
나를 외면한 채 굳건히 돌아선 등이 그래도 반갑고 조금은 서운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당한 채로 호락호락 넘어갈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경계하는 마음도 있었다. 마냥 미안하다고 해서 편하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얼마 전 재미있는 사건이 들어왔어.”
지헌이 돌아서며 흥미로운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뉴스에서 들어 봤지? 연예인 이유림 사건.”
얼마 전 남자 친구와 법적 공방으로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눈앞의 파일로 시선을 내렸다. 수사 기록과 간단한 사건 개요가 있었다.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데 지헌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자는 남자와 사귀면서 지속해서 후원을 받았어. 그 대신 성관계를 이어 왔고. 근데 헤어지고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사기죄로 억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한 거야.”
“…….”
“사귀는 동안 남자가 지불한 돈이 핵심인데, 어떻게 생각해?”
“…….”
“스폰일까 아니면 단순한 연인 사이의 지원일까?”
지헌은 느긋이 나를 돌아보며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에 대한 농락을 담고 있었다. 나는 파일을 내려놓고 정색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만해.”
“뭘?”
“너 지금 사건 얘기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나 엿 먹이고 싶은 거잖아.”
“난 단순히 네 법률적인 견해가 궁금할 뿐이야.”
“너 나한테 복수하고 싶지. 그래서 나 뽑은 거지? 나 괴롭히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너한테 복수를? 전혀.”
책상을 짚은 지헌이 내게 몸을 숙이고 가까이 눈을 맞추었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단단한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나는 손안의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지헌은 위협하듯 내게 다가오며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넌 우리 관계가 스폰이었다고 생각해?”
“더는 너랑 같이 못 있겠어.”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지헌은 자꾸만 나를 궁지로 몰아가 심리적으로 폭발하게 만들었다.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돌리는데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날아왔다.
“앉아. 거기서 문 열고 나가면 넌 영원히 끝이야.”
“…….”
손잡이를 움켜쥔 손이 멈칫했다. 현재 정지헌은 내 목숨 줄을 틀어쥐고 있었다. 명백한 권력의 차이를 느끼며 주먹을 꾹 쥐고 결국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지헌은 고분고분한 나를 보며 입술 끝을 올렸다. 내게 미치는 본인의 영향력이 몹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앞으로 지헌과 같이 일하는 날들의 예고편을 본 기분이라 벌써 피곤했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응시하며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 법률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여자에게 결혼 의사가 있었다고 밀고 나갈 생각이야. 내심의 의사니까 입증은 어렵겠지만 해 볼 만해. 상대 쪽도 여자의 기망(欺罔) 의사를 입증시켜야 하는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스폰과 사귀는 사이의 지원이란 게 사실 애매한 문제거든. 남자가 지불한 돈이 대가성을 가졌는지가 중요한데 성관계 없이도 만남이 이어졌다고 주장할게.”
“법정에서 그 말이 통할까? 억이 넘는 돈이 오고 갔는데?”
“믿게 만들어야지.”
“그런 사이에 진짜 사랑이 가능할 거 같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네 경험담이야?”
“부탁인데, 일할 때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마.”
“좋아.”
지헌은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그 정도면 만족한 듯 걸터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폰으로 밝혀지면 검찰에서는 성매매로 추가 기소 들어올 거야. 무조건 민사로 끝내야 돼. 일단 증인 연습부터 시켜.”
“재판이 언제야?”
“다음 달.”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파일을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그러곤 지헌을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했다.
“다 끝났으면 나 이제 가도 되지?”
일부러 고분고분한 척 지헌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헌은 그 정도 반항은 우습다는 듯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가 봐.”
인사도 없이 쌩하게 일어나서 문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우뚝 멈춰서 돌아섰다. 그러곤 진지하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근데 앞으로도 너 이런 식이면 나 같이 일 못 해.”
“이런 식?”
지헌이 날카로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발끈한 얼굴이 어처구니가 없다.
재회한 이후로 볼 때마다 온갖 방법으로 내게 이죽거리고 신경을 긁어내렸다.
앞으로 내내 이런 식으로 부딪힐 걸 생각하면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오르는 것 같다. 나도 날을 세웠다.
“사사건건 시비잖아. 나한테 감정 섞지 마.”
“일에 개인적인 감정 섞는 건 너지. 왜 이 여자에게 감정 이입 하는 거야?”
지겨워. 또다시 원점이었다. 나는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굳이 내 대답을 듣고 싶다면. 그래, 말해 줄게.”
“…….”
“너한테 많이 의지했고, 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너한테 끌렸어.”
“…….”
“근데 너한테 본격적으로 원조받으면서, 내가 네 요구를 거절한 적 있었어?”
지헌에게 끌렸던 것도 사실이고 원조받으면서 성관계 없이는 만남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게 내 마음에 우울을 만들었다.
지헌에 대한 열등감과 자존심과 성공하고 싶은 욕망으로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던 마음은 나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지우고 싶고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자꾸만 파헤치는 지헌을 이해할 수가 없고 그런 그에게 화가 났다.
“이 정도 답변이면 충분하니?”
지헌을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거칠게 돌아섰다.
지헌이 떠나고 나는 마음 기댈 곳이 없어서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한 건 지헌이 유학 가고 다시는 지헌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난 후였다.
공부하면서 내내 언젠가는 한 번쯤 만날 것으로 믿었고, 그땐 예전과 다르게 정말 잘 끝맺고 싶었다.
결국 이렇게 또다시 엉망진창으로 되어 버렸지만….
“상대방이 어떤 방법으로 방어할 것 같습니까?”
“…….”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은?”
“…….”
“대답해 보세요. 최미희 변호사님.”
회의실에 앉아 있는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생각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직접 증거는 없지만….”
“없지만?”
박선호가 얄밉게 말꼬리를 잡았다.
“다른 사실로 추정할 생각입니다.”
못 미더운 듯 박선호가 다시 반문했다.
“판례는요?”
“하급심에 유사 판례가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전략이란 게 없네. 이대로 나가면 박살 나지.”
다리를 꼬고 앉은 박선호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내가 밤새워 작성한 변론 조서 초안을 툭 책상 위로 던졌다.
그 옆에 앉은 정지헌은 내내 무료한 얼굴로 내가 당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나는 잠자코 서류만 내려다보았다.
어제 퇴근하면서 박선호가 아침까지 자기 책상 위에 갖다 두라고 지시한 문서였다.
일부러 엿 먹이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신입인 새끼 변호사 주제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족한 시간 탓에 조서는 허술했다.
박선호는 남자 인턴이 만든 조서와 조목조목 비교하며 내 조서를 깎아내렸다.
“이거 인턴보다 못해서야, 원.”
쯧, 혀를 차는데 무척이나 얄미웠다.
인턴이 작성한 조서는 도저히 초보의 실력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인턴에게는 미리 과제를 알려 주고 첨삭까지 해 준 게 분명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엿 먹이려는 작전이라면 아주 대성공이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여자가 들어왔다. 법정에서 정지헌 옆에 붙어 있던 비서였다.
“차 드시고 하세요.”
사람 수대로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온 여자는 상큼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파트너 비서인 그녀는 주로 정지헌과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헌은 여자가 들어서자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건네받았다. 별로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데 저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게 뭐라고 조금 충격이었다.
“뜨거운데 왜 혼자 들고 와.”
“감사합니다.”
여자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듯 민망한 얼굴로 살짝 웃어 보였다.
지헌은 여자에게 빨대를 챙겨 주고 여자에게 휴지가 필요하다 싶으면 찾기 전에 먼저 가져다주었다. 대화하면서도 지헌의 신경은 내내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눈길 한 톨 주지 않으면서 여자만 챙겼다.
이후 회의는 엉망진창이었다.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는 듯 작정하고 몰아붙이는 박선호에게 제대로 한 번 반박해 보지도 못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잘못 데려온 거 아니냐, 쟤 낙하산이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머릿속으로는 지헌이 여자를 신경 쓰고 챙겨 주는 장면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굳이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저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으면서 거기에 신경 쓰는 내가 이상했다.
서류를 챙겨 들고 뒤늦게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투명한 유리로 지어진 휴게실에서 여자가 정지헌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도에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박선호가 심술궂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엿 먹였으면 됐지, 또 무슨 볼일이 남았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박선호는 시선을 휴게실에 향한 채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너 지금까지 남자들 쥐락펴락하면서 인생 편하게 살아왔지.”
“뭐?”
“남자들 다 너한테 슬슬 기잖아. 근데 난 어림없어. 네가 무슨 꿍꿍이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난 지헌이처럼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거야.”
“…….”
“앞으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여기서 뛰쳐나가게 만들 테니까.”
적개심이 대단하네. 어디를 가든 괴롭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선전 포고하는 인간은 또 처음이었다.
대학 때 딱히 존재감도 없었고, 나와 대화 한번 해 보지 않은 인간이 내게 이럴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헌에게 가진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어 냈다. 이직한 첫 주부터 참 인상 깊은 환영식이다.
휴게실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데스크로 발길을 돌렸다. 데스크 자리는 비어 있고 살짝 열린 준비실 틈으로 직원들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송국에서 정지헌 변호사님 찾는 전화 또 왔다며?”
“거절해도 자꾸 오네. 변호사님 그런 소개팅 프로그램 싫어하신다니까.”
“한동안 결혼 정보 회사에서 그렇게 오더니 이제는 방송국에서 오네. 그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알고 오는지 몰라.”
“근데 변호사님 여자 친구 있지 않아? 연예인인지 모델인지 한동안 변호사님 방에 들락거린 여자 있었잖아.”
“자기 혼자 열 올린 거지, 뭐. 법조계 집안에서 뭐가 아쉬워서 연예인을 만나겠어.”
정지헌 집안이 법조계였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냥 막연히 있는 집 자식이겠거니 생각했지, 딱히 궁금해한 적은 없다. 그러고 보니 언뜻 듣긴 했던 것 같은데, 그 당시는 워낙 지헌에게 관심이 없어서 뇌리에 남아 있는 정보가 없다.
그 이후로도 직원들의 대화를 통해 지헌의 여성 편력은 종종 귀에 들어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특성상 지헌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재력가 집안에서 맞선이 들어오고, 결혼 정보 회사에서도 줄기차게 전화가 오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여자가 있고.
그때마다 마음이 이상했다. 돈 많고 잘생겼으니 당연히 여자가 있겠지. 대학 때도 따르는 여자는 많았으니까. 오히려 여자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과거의 지헌은 내게 병적으로 집착해서 문제였지, 적어도 다른 여자에게 곁눈질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처음 보는 지헌의 모습이 어색해서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대책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니까. 진짜 말도 안 돼.
나는 황망한 얼굴로 연신 중얼거렸다.
빨간 줄이 변론 조서 위로 사정없이 그어졌다. 줄이 늘어날수록 지헌은 미간을 심하게 구겼다.
나는 지헌의 책상 옆에 두 손 잡고 서서 처참하게 해부되는 문서를 지켜보았다. 며칠 전 회의 이후 다시 작성한 문서였다.
증거도 부족하고 의뢰인도 비협조적인 사건을 외국 판례부터 하급심 판례까지 눈 빠지게 찾아 가며 밤새워 전략 세웠더니 빨간 펜으로 난자하고 있었다.
“너, 나 엿 먹이려고 이래?”
얼굴로 뭔가 날아들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지헌이 채점이 끝난 조서를 눈앞에 모욕적으로 날리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잠자코 책상에 떨어진 조서를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일정이 꼬였다.
평상시처럼 정장 바지를 입으려다가 문득 회의 중 들어온 여자가 생각났다.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예전에 정지헌과 어울릴 때는 나도 치마를 즐겨 입었는데 연수원 생활을 거쳐 변호사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여성성을 드러내는 옷은 멀리했다.
나는 여자와 나를 곱씹으며 비교했다. 지금은 나이에 맞는 얼굴을 찾았지만, 어려서부터 조숙한 이미지로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또래보다 몇 살 더 많게 오해받고는 했다.
그게 은근히 콤플렉스였는데, 우습게도 여자의 어려 보이는 얼굴과 상대적으로 조숙해 보이는 나를 세세히 비교하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옷장을 뒤져서 언젠가 세일할 때 사 두고 입지 않은 치마를 꺼내 입었다.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어쩐지 출근복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도 같고. 오랜만에 입어서 감이 안 왔다. 스커트에 어울리는 블라우스도 이것저것 대보며 고르다가 결국 월요일 아침부터 지각했다.
부랴부랴 서류를 들고 지헌의 방을 찾았다. 지헌은 잔뜩 벼르고 있는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원래대로 입고 출근할 것을 괜히 이거저거 갈아입다가 지각했다. 정말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전 로펌에 있을 때는 재판 때만 단정히 입으려고 신경 쓰는 정도였지, 평상시는 바지에 셔츠만 돌려 입었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해서 월요일 아침부터 일정이 꼬였다고 하기에는 이직한 후로 나는 매일 지헌에게 깨지고 있었다. 지헌은 조서 중간을 볼펜으로 지적했다.
“모른다고 주장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중간에 말 바꿔서 일관성 깨면 어쩌자는 거야.”
“의뢰인이 고집부린 거야. 그건 사건과 관련 없는 증거라고 했지. 괜히 내 봤자 쟁점만 흐리고 나중에 정작 중요한 증거는 못 낸다고. 아니래. 자기는 죽어도 내야겠대. 뭐는 준비 서면에 넣고 뭐는 변론에서 빼라. 아주 자기가 변호사야.”
지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딱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 앞으로도 이럴 거야?”
“뭐가?”
“여기가 학교인 줄 알아? 의뢰인 다루는 것도 변호사 능력이야. 이런 의뢰인 하나 제대로 못 다룰 거면 앞으로 넌 송무에서 빠져.”
지헌은 냉정하게 통보하고 할 말 끝났다는 듯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준비 서면을 작성하는 모양인데 꽤 시끄러웠던 사건이라 연일 뉴스에 나왔던 기억이 난다.
지헌은 사건을 맡으면 법적 이슈를 끌어내고 기념비적인 판결로 대법원 공보에 종종 이름이 실리곤 했다. 공부하면서 지헌의 소식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유였다.
억울하지만 멋있긴 했다.
“뭐 해? 안 나가고.”
“다시 해 볼게.”
열심히 공부하고 형편없는 시험지를 손에 쥐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본다. 오기 어린 음성에 지헌이 슬쩍 눈썹을 추켜세웠다.
나는 지헌의 서류에서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문 앞에는 박선호가 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누가 들으면 내가 정지헌 사무실이 아니라 안방에서 걸어 나오는 줄 알겠다. 지헌과 재회한 날 아파트에서 마주친 후로 부쩍 나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알고 보니 대학 때부터 정지헌 옆에서 우리의 연애사를 다 지켜봤다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볼 때마다 사람을 도끼눈 뜨고 노려보는데 상대하기 귀찮았다.
그런 내 앞을 박선호가 막아섰다.
“사람 말이 안 들려?”
“들리니까 말씀하세요.”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불량하게 답했다.
“오후까지 건물명도소송 관련 판례 찾아서 내 책상 위에 갖다 놔.”
박선호는 찍어 누르듯이 내게 명령했다. 혈압이 쭉 상승한다. 상사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제대로 굴리려나 본데, 내가 너 정지헌 때문에 봐주는 것도 모르고.
“죄송하지만 어렵겠는데요. 변론 보고서 작성해야 합니다.”
“뭐? 이게 아주 신입 주제에 빠져 가지고.”
“어소보다 승소 낮은 파트너 주제에 뭐라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박선호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송무 실력이 형편없는 박선호는 그나마 정지헌 덕분에 파트너로 버티고 있었다. 아무도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었다.
“야! 너 뭐 믿고 이래. 너 정지헌 믿고 이렇게 까불어? 이게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누가 정지헌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네.”
“이게 진짜!”
거친 언성에 벌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지헌은 서늘한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호는 눈에 힘을 풀고 재빨리 지헌에게 가서 붙었다.
“쟤가 먼저 하극상했어.”
고자질하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지헌은 박선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무심히 박선호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고 간단히 사인해서 돌려주었다.
“감정 평가 나올 때까지는 일단 이대로 진행해.”
박선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다가 아 참, 하며 깜박했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손뼉 쳤다.
“의원님과 약속 있는 거 기억하지? 잊지 말고 나가. 의원님 따님도 나오는 자리니까. 의원님이 몇 번이나 네 이야기 하시더라. 사윗감으로 네가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봐.”
“알았으니까 가 봐.”
지헌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는 잔뜩 힘이 들어간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예전에야 지헌을 네 멋대로 흔들었겠지만 이젠 어림도 없다. 이제 지헌은 너와는 급이 다른 인간이다.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의원 따님 운운하며 약속을 상기시킨 것도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내 신경 긁어 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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