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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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흐으….”
거친 숨소리가 이어지더니 지헌은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열 있는 것 같아. 너무 뜨거워. 이거 진짜 안에 넣고 하는 기분이잖아.”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그거였구나. 평소보다 열이 올라 입 속이 뜨거웠고 그게 몹시 자극적이었나 보다.
지헌은 정신없이 쾌락에 빠진 얼굴로 내 뒷머리를 붙잡고 허리를 들썩였다.
“하아… 하… 흐읍.”
입 안을 아래쪽 촉감처럼 느끼며 흥분하는 모습에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변태 새끼.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뜨겁게 박동하는 성기를 입에서 뱉어 냈다.
한껏 달아오르게 하고 중간에 멈추자 지헌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나는 울컥한 마음을 삼키고 내키지 않은 애무를 이어 갔다. 손으로 위아래로 쓰다듬고 엄지손가락으로 우묵하게 파인 곳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계속해. 응… 그래.”
“있지. 나 부탁이 있는데.”
지헌이 쾌락에 완전히 젖어 들었을 때쯤 슬며시 입을 떼었다.
“카드 말고 현금으로 쓰고 싶어.”
나른하게 젖혀진 고개가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왔다. 욕정에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왜?”
“그냥 답답해.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다 마음먹기 나름이야.”
“카드 두고 나가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가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어. 내가 짐 덩어리 같고 아무 쓸모 없이 느껴져.”
“왜, 도망가게?”
시무룩해서 하는 말에 지헌이 피식 웃으며 장난처럼 받았다.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번득 들었다.
“뭐?”
“농담이야.”
지헌은 하하 웃으며 마저 하라는 듯 내 뒷머리를 잡고 다리 사이로 지그시 눌렀다. 나는 애써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성기 끝만 살짝 입에 물었다. 그러나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하는 시늉만 낼 뿐 머릿속이 복잡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아. 속옷 좀 벗어 봐. 가슴에 대고 문지르게.”
지헌은 이미 대화에서 빠져나와 열락에 빠져들었다. 나는 딴생각을 하느라 지헌의 말을 놓치고 되물었다.
“…뭐?”
“생각 없는 사람 옆구리 찔렀으면 책임져야지. 왜 자꾸 모른 척이야.”
지헌은 웃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왠지 불길해 보이는 미소였다.
지헌은 셔츠를 뒤로 벗기고 브래지어 호크를 풀어내었다. 부드럽고 탄력 있어 보이는 가슴은 흘러내리는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가끔 지헌이 만져 보고 싶게 생긴 몸이라고 침대에서 하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봐도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지헌의 시선은 더욱 음욕에 차올랐다. 지헌은 부풀어 오른 성기를 잡고 끈적한 액체를 윤활유 삼아 가슴에 대고 거침없이 문질렀다.
“발기했어, 네 젖꼭지.”
분명 지헌의 말대로 젖꼭지는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지헌이 비벼 댈수록 빨간 봉우리는 굵게 자라났다.
“열심히 빨아 준 보람이 있어.”
지헌은 짓궂게 웃으며 발기한 끝끼리 서로 비벼 대고 가슴골에 성기를 끼우면서 상스럽게 욕구를 채워 갔다.
지헌의 음란함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잠자리에서 빼는 편은 아니었다. 둘 다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 침대에서 한계는 없었다.
지헌과는 모든 것을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즐길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쾌락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으흣.”
마음껏 가지고 놀았는지 얼마 안 있어 가슴골에 대고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하얗고 말랑한 살결 위로 정액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게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온몸이 기진맥진했다. 지헌이 건네주는 휴지를 손으로 밀어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올 때까지 지헌은 침대 위에서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날아온 말이 나를 붙잡았다.
“이거였어?”
“뭐?”
지헌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보란 듯이 내게 들어 보였다. 한 푼 두 푼 모아 온 내 통장이었다.
“내 돈이야. 이리 내놔.”
눈이 뒤집혀서 지헌에게 달려들었다. 지헌은 기를 쓰고 통장을 뺏으려 드는 나를 한쪽 팔로 여유 있게 붙잡았다.
“정우라고 고등학교 동창인데 우리 학교 경영학과 다니거든. 너한테 중고 책을 샀다는 거야. 다른 과 애들한테 팔면 모를 줄 알았어?”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들켰다는 마음 이전에 내게 조금의 자유도 주지 않는 지헌에게 화가 치밀었다.
지헌은 통장을 열어 금액을 읽으며 비죽하게 웃었다.
“60만 원? 눈물 나네. 어쩐지 매일같이 서점에서 카드값이 찍히더라. 그걸 중고로 팔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러곤 칼날 같은 눈빛을 내게 돌렸다.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분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헛짓하고 다니는 걸 알면서 너의 행복만을 바란다느니 개소리를 늘어놓고, 일부러 나를 떠보고 농락한 지헌에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내 눈물에도 지헌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완고한 얼굴로 취조를 이어 갔다.
“이거 모아서 뭐 하려고?”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면 북받치기 시작한 설움에 더욱 크게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울음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지 않았다.
지헌은 나를 구속하려 했고 폭군처럼 강압적으로 굴었다. 당연하게 나에 대한 권리와 독점을 주장했다. 지헌에 대한 나의 화는 정당했다. 그걸 나만 알고 지헌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도 지헌의 성기는 반쯤 일어서 있었다. 그게 미치도록 징그러웠다.
막 샤워 후 물기 젖은 머리칼과 하얀 목덜미를 훑는 눈에 욕정이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나를 침대로 쓰러트리고 발기한 성기를 내게 쑤셔 넣을 것만 같았다.
나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지헌은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욕정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시종일관 당당했다.
“이런데 내가 뭘 믿고 너한테 현금을 줘. 그리고 기분 더러우니까 앞으로 침대에서 거래하듯이 돈 얘기 꺼내지 마.”
차갑게 내뱉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툭, 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가 뭔데. 도대체 네가 뭔데.
울분이 치솟아 견딜 수 없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두꺼운 책을 집어 들어 화장실 문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퍽, 소리가 들리고 화장실 문이 크게 울렸지만, 안에서 반응은 없었다.
그게 더 열받게 했다. 연이어 두 권, 세 권 문을 향해 책을 집어 던지고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돈 갖고 날 휘두른 건 너잖아! 이 역겨운 놈아! 제발 나 좀 놔줘, 나 좀 놔 달라고!”
달칵 화장실 문이 열리고 무서운 얼굴의 지헌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나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지헌은 한 손으로 나를 낚아채서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저항하는 내 몸을 강하게 포박하고 몸을 겹쳐 왔다. 무릎이 억지로 구부려 올려지고 지헌의 성기는 몸속 깊은 곳에 박혀 들었다. 그 상태로 지헌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흐읍. 후으, 후으.”
“흐윽… 흑.”
찌걱찌걱 살 부딪히는 소리와 지헌의 거친 숨결과 나의 흐느끼는 소리가 뒤엉켰다. 북받치는 설움에 가슴이 콱 막혀 흐느껴 울었다. 관자놀이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 내 귀에 대고 지헌은 거친 숨을 쏟아 내었다.
“왜, 사람 단물만 빼먹고 내빼시려고?”
“흐읏… 흑.”
“포기해. 안 그럼 너만 힘들어. 난 너한테 흥미 안 떨어졌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내 도움 받고 살라고. 어려운 거 아니잖아?”
등 뒤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른 숨소리를 유지하며 눈을 뜨지 않았다. 혼자 남겨지길 기다리는데 별안간 목덜미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다. 지헌이 내게 키스하던 자세 그대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에 자는 척하면 나갈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 허를 찌른다. 일부러 자는 척한 걸 알고 그런 짓을 한 게 분명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축축한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저 지긋지긋한 놈.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괴롭혀.
어제도 밤새도록 사람을 들들 볶아 댔다. 마지막 기억이 욕실에서 씻을 때였는데 벌써 다음 날 오후였다. 폭풍 같은 밤이 무색하게 지헌은 느긋했다. 나는 방패막이처럼 이불을 꽉 쥐고 지헌을 노려보았다.
지헌은 질색하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너는 잘 때가 제일 예쁘다’ 이딴 말을 툭 내뱉고 방을 나갔다.
별 거지 같은 말을 다 들어 보겠네. 잘 때가 제일 예쁜데 깨어 있는 사람을 붙잡고 주야장천 발정하냐?
지헌이 사라진 쪽을 노려보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간밤에 지헌은 나를 확실히 꺾어 놓았다. 이제는 내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는 이미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때까지 정지헌과 이러고 지지고 볶고 살 것 같다. 지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우리 기분 전환하게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우울해져 있는 내게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물어 왔다. 간밤의 일은 지헌에게 기분 전환으로 잊힐 사소한 일이었다.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 뭘 물어봐.”
“…….”
“내 말이 틀려? 결국 다 네 뜻대로 할 거잖아.”
언성이 높아진다. 지헌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네가 피해자처럼 굴어? 어처구니없어서 지헌을 노려보았다.
“너 기분 안 좋으니까 바람 좀 쐬고 오자는 거야. 갔다 와서 어제 내가 말한 자료 줄게.”
이게 정지헌 수법이다. 내가 고집을 피울 때마다 지헌은 내 목줄을 틀어쥐고 어르고 달래면서 길들이려 했다.
이불을 덮어쓰고 시위했지만 계속되는 지헌의 회유에 결국 집을 나섰다.
차 안에는 내내 불편한 침묵만 맴돌았다. 나는 음식점에 도착할 때까지 지헌을 외면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지헌도 굳이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멈추어 서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뭐 먹고 싶냐고 묻기에 한정식만 빼면 다 좋다고, 갈 데 없으면 레스토랑이나 가든지, 했는데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정원이 예쁜 한정식집이었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그런 것만 좋아하니까 네가 자꾸 골골대는 거야. 건강에 좋은 거 먹어.”
차에서 내린 지헌이 성큼성큼 돌아서 내 쪽 차 문을 열었다.
“내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집스레 정면만 응시했다. 나를 위해 준다면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결국 다 자기 마음대로였다.
지헌은 훅, 하고 숨을 내쉬며 차 안으로 쓱 고개를 밀어 넣었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내려.”
나는 고개를 돌려 반항심 어린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단단한 눈동자가 코앞에서 반짝인다.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뒤섞였다. 지헌의 시선은 내 입술을 향해 있었다.
“키스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그러곤 실제로 키스할 듯 바짝 다가왔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차에서 내려 성질껏 문을 쾅 닫았다. 생각보다 큰 굉음에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뭐야, 깜짝이야.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나 실컷 먹어.”
침을 뱉듯 말하고 휙 돌아서는데 지헌이 내 팔을 붙잡았다.
“너 진짜….”
“어머, 너 지헌이 아니니?”
지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였다. 지헌은 험악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들려다 주춤하며 아주머니에게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안녕하셨어요.”
“응, 오늘 여기서 모임 있잖아. 너희 엄마도 있는데… 잠깐만, 여기 지헌이 있어요.”
아주머니는 멀리 서 있는 일행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 말에 곱게 단장한 아주머니가 지헌을 알아보는 눈치더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지헌과 나는 대치하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서서 눈을 마주쳤다.
‘어떡할 거야.’
낭패 어린 얼굴로 지헌에게 눈짓했다. 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은 다가오는 아주머니에게 향한 채 내게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러게 내리랄 때 내리면 좋았잖아. 왜 소란스럽게 만들어 사람들 이목을 끌어.”
그사이에 아주머니는 성큼 우리 앞에 당도했다. 아마도 지헌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지헌은 나를 등 뒤에 숨기고 쓱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으응, 오늘 모임이 있어서.”
아주머니는 지헌에게 건성으로 답하며 시선은 나를 향했다. 세세히 뜯어보는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다.
나는 불편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릎 안 좋다면서 병원은 다녀오셨어요?”
지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며 아주머니 어깨를 감싸고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건 됐고, 여긴 누구…?”
그러나 아주머니가 지헌의 팔을 밀어내고 넌지시 나를 가리키자, 지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치워 나를 아주머니 앞에 노출했다.
“…제 일행이에요. 밥 먹으려고 왔어요.”
깽판 칠까.
순간 생각이 스쳐 갔다. 그러나 아무 죄 없는 지헌의 부모님 앞에서 패악을 떨 자신은 없었다. 나에게 그런 봉변을 당하시기에는 너무 고운 분이셨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아가씨가 전에 말한 그 아가씨지?”
‘전에 말한’이 귀에 걸렸다. 나를 알고 있어? 곧바로 지헌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네, 하고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게 생겼네. 아가씨, 반가워요.”
아주머니가 내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생각보다 큰 환대에 나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친근하게 내 손을 토닥였다.
“웃으니까 더 보기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데이트 잘해.”
아주머니는 지헌에게 한마디 던지고 일행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헌과 나도 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입맛이 없다. 화낼 타이밍은 지나갔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까 일을 곱씹다가 문득 지헌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날 아셔?”
“알지, 왜 몰라.”
지헌이 젓가락을 내 앞에 놔 주며 대답했다.
“네가 말씀드렸어?”
“이미 알고 계셨어.”
지헌이 잠시 멈칫하며 대답했다. 그제야 저번 학교에서의 사건이 지헌의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승아 언니가 지헌이 사촌이니까.
생각보다 큰 사건의 여파가 곤혹스러웠다.
“별말씀 안 하셨어.”
“내 사정 다 아는데도 좋다고 하셨다고?”
“승아 누나가 많이 도와줬어. 뭐, 허락 안 해도 상관없고. 안 보고 살면 그만이야.”
“미쳤구나.”
“그래,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너 데려오지 않았어.”
되레 당당히 나오는 지헌에게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냥 모든 걸 다 물리고 싶었다. 지헌의 집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무작정 집에서 뛰쳐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지헌과 가볍게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모든 게 다 후회되는 일투성이다. 이렇게 골치 아파질 줄이야.
지헌은 이미 아까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 줄줄이 나오는 코스 요리 중에 맛있는 것만 골라서 내 앞 접시에 놔 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모양 예쁜 거로 신중히 고르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몇 점 주워 먹었는데 그게 얹혔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먹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지헌은 작게 혀를 찼다.
'너 아직도 포기 못 했구나, 그래서 네가 자꾸 아픈 거야.'
지헌의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지헌은 왜 자꾸 내가 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리석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자 그나마 숨통 트이는 기분이었다.
비가 그친 정원이 꽤 운치 있었다. 연잎에 고인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걸 보면서 지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고운 외모에 온몸에 교양이 넘쳐흘렀다. 평생 고난을 모르신 분 같다. 그 점은 지헌과 비슷했다. 지헌도 평생 좌절이라는 단어를 모를 것 같았으니까.
발길을 돌려서 다시 가게 안으로 향했다.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인 복도를 헤매는데 문득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근데 애가 좀 청승맞아 보이지 않아?”
지헌의 어머니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아주머니들이 좌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요즘 애 같지 않게 얌전해 보여서 나는 좋던데? 학교도 지헌이랑 같다고 하지 않았어?”
“응, 지헌이가 공부시키고 있나 봐. 똑똑한 애니까 공부는 시켜 주려고. 지헌이 할아버지도 성에 차지는 않는 눈치인데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공부도 잘하고 참하고 똑똑하고 그럼 됐지. 왜, 집안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도 못사는 집에서 며느리 데려와야 집안이 편해. 잘사는 집 애들은 실속이 없어. 내조는 영 꽝이야.”
“맞아요. 오히려 똑똑하고 친정 뒷배 약한 저런 애가 나아요. 잘사는 집 애 데려와 봤자 사치도 심하고, 못살아야 시댁 눈치도 보고 휘두르기 편하죠.”
“네, 좋게 생각해요. 친정이 어려우니까 애가 말은 잘 듣겠던데요. 딱 봐도 고분고분하잖아요. 잘사는 집 애 데려와 봐요. 불편해요. 우리 집 며느리는 아빠가 장관이라고 애가 어찌나 공주처럼 곱게 자랐는지 비위 맞추기 힘들어요. 아주 손가락 까닥 안 하고 상전이 따로 없다니까요. 제가 눈치 보고 살잖아요. 이래서 며느리는 낮은 데서 데려오라고 하나 봐요. 그래야 큰소리치고 살죠.”
“그렇지? 그래도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고 대학 온 거 보면 애는 똑바른 거 같아.”
엄마들은 본능적으로 자식에게 해가 될 사람을 아는 걸까. 지헌의 어머니는 연신 애는 똑바르다고. 그거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 뒤로도 아주머니들은 나에 대한 세세한 품평을 이어 갔다. 당황해서 얼버무리듯 인사하고 지나갔는데 어찌나 첫인상은 좋게들 보셨는지, 예쁘고 똑똑하고 얌전하고 참해 보이고. 그 좋은 말씀들 뒤에는 부려 먹기 쉽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생각해 보면 딱히 나쁜 분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내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시고, 좋은 말씀만 하셨다.
어차피 나도 지헌이 어머니 앞에서 떳떳한 입장은 못 되었다. 지헌의 어머니가 내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걸까. 집에서 나올 때는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만 해결되면 지헌과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 일을 겪으니까 자존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헌이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둘이 결혼시킬까 생각 중이야. 저렇게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 그래야 우리 지헌이도 마음먹고 공부에 집중하지.”
“그래, 아예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여유 있을 때 둘이 결혼시키면 되겠네. 지헌이 할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시다며. 돌아가시기 전에 지헌이 결혼하는 모습 보시면 좋지.”
더 이상 듣다못해 돌아서는데 화장실에 갔다 왔는지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해요?”
아주머니는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의아하게 보면서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룸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 지헌이 여자 친구 왔는데, 못 들어가고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네.”
“아니요, 저….”
급히 만류하는데 이미 아주머니들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방금 전까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그중에 한 아주머니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잠깐 이리 들어와요. 안 그래도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 해서 아쉬웠는데.”
“아닙니다. 복도에서 길을 잃어서 잘못 찾았습니다. 지헌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지헌이 어머니는 내가 이해 간다는 듯이 친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금은 자리가 좀 어렵지요? 다음에 지헌이하고 같이 집에서 편하게 봐요.”
“네. 말씀 나누세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유, 참한 거 봐. 지헌이 엄마는 참 좋겠어.”
“여차하면 그냥 지헌이 내조시켜도 되겠어. 뭐 하러 고생스럽게 공부시켜.”
아주머니들은 내가 돌아서기 무섭게 나를 칭찬했다. 문득 이렇게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서는 내가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근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뭔데 그래요?”
아주머니들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안 보고 살면 그만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기 위해 지헌이 애를 많이 썼다는 걸 알고 있다. 나도 지헌에게 일말의 미안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넘어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전 지헌이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시기에는 더더욱이요.”
지헌이 어머니가 당혹스러운 듯 물어 왔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우리 지헌이는 아가씨하고 이미 얘기 다 됐다고 하던데?”
“전 모르는 일이에요.”
“아가씨 말은 지금 우리 지헌이 혼자 아가씨 좋다고 따라다닌다는 거예요?”
말끝에 강한 불쾌감이 실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도 노기가 드러났다. 주위 사람들도 일순 조용해져서 지헌의 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제 지헌과는 영원히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니 지헌도 별로 입맛이 없는지 상 위에 음식은 그대로였다. 지헌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매를 찌푸리며 이마를 만졌다.
“너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그냥 속이 좀 안 좋아.”
지헌의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지헌은 나를 부축해서 차 안으로 데려갔다. 어머니들이 있는 방에서 잘 보이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운전하면서 지헌은 간간이 나를 흘끔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창밖 풍경만 눈에 담았다.
“친정 뒷배 약한 애.”
“부려 먹기 좋은 애.”
“지헌이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둘이 결혼시킬까 생각 중이야.”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거부할수록 지헌은 더욱 맹렬해져서 내가 도망갈 퇴로를 하나씩 차단시켰다. 지헌과 동거하면서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갑자기 지헌이 욕을 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폭주족들은 유독 지헌의 외제 차를 노렸다. 두셋씩 떼를 지어 아슬아슬하게 지헌의 차에 붙었다가 지헌의 앞으로 위험하게 휙 껴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지헌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급브레이크를 밟고, 급히 고개를 돌려 내 안색을 확인했다.
“괜찮아?”
“차, 차 좀 세워 봐.”
괴로운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간신히 울렁거리는 속을 참고 있었는데 거친 운전에 속이 뒤집혔다.
지헌은 주위를 살피며 급히 차를 정차시켰다. 차가 갓길에 멈추자마자 나는 문을 열고 구르듯 튀어나와 왈칵 속을 게워 냈다. 어떻게 제지할 틈도 없이 꾸역꾸역 토사물이 쏟아졌다.
지헌은 급히 운전석을 빠져나와 내 등을 토닥였다. 먹은 것이 없어서 구역질해도 더는 넘어오는 게 없었다.
나는 도로 턱에 축 늘어진 채 주저앉았다. 식도가 긁힌 것처럼 따끔거리고 온몸이 기진맥진했다.
“기다려. 물 사 올게.”
지헌은 재킷을 내 어깨에 덮어 주고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계산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지헌은 줄 끝에 서서 초조한 눈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그때 폭주족들이 편의점 근처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농담을 던지고 낄낄대며 헬멧을 벗었다. 고등학생 정도 될까? 다들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그중에 한 명을 발견하고 뭐에 홀린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달려가듯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출발해.”
폭주족 중에 익숙한 사람의 오토바이에 무작정 올라타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딱히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대책 없이 일을 저질렀다.
놀란 영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예요, 쌤? 얼굴이 왜 그래요?”
“빨리, 빨리.”
급히 재촉하며 불안한 얼굴로 뒤를 흘깃거렸다. 지헌이 무서운 얼굴로 편의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제발!”
소스라치게 놀라 지르는 비명에 영우는 채찍이라도 맞은 듯 후다닥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영우도 백미러를 흘끔 확인하며 나를 잡으러 오는 지헌을 눈치챈 듯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중얼거리며 영우가 정신없이 오토바이 페달을 밟았다. 시동이 걸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지헌이 나를 낚아챌 것만 같아 심장이 조여들었다.
오토바이가 총알같이 튀어 나가고 동시에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뒤를 확인했다. 성큼성큼 내게 오던 지헌이 급히 방향을 틀어 차를 향해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도로 위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영우는 폭주족으로 꽤 거침이 없었는데, 지헌도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잔뜩 독이 올라서 우리를 쫓아왔다.
너무 가깝게 따라붙어서 고개를 돌리면 분노 어린 지헌과 눈이 마주쳤다. 꼭지가 확 돌아서 이성을 잃은 게 느껴졌다.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대로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심장이 죄여 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영우의 허리를 꼭 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지헌은 양쪽 차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우리를 추격했다. 범상치 않은 기색에 주위 차들조차 최대한 속도를 늦추거나 차선을 변경하며 지헌의 차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덕분에 지헌은 더 수월하게 우리를 쫓아올 수 있었다.
일단 출발하면 적당히 떨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헌은 위험천만한 곡예 운전을 지속하며 무섭게 따라붙었다.
빵, 하고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이 도로를 가득 울렸다. 영우도 식겁한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뒤에 태운 나 때문에 적당히 조절하면서 운전하는 느낌이었는데, 점점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제는 정말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끼익, 찢어질 듯한 소음과 함께 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골목으로 위험하게 회전을 시도했다.
지헌도 즉각 거칠게 핸들을 틀며 옆 차선으로 뛰어들었다. 이어서 끼익, 하고 급정거하는 차들로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나마 주위 차들이 방어 운전을 하고 있어서 심각한 추돌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엉망이 된 차들 속에 갇혀 지헌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골목을 지나 한참을 달리고서야 영우는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와 씨, 진짜 장난 아니네.”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식겁해서 한마디 뱉고 나를 보고 핏대를 세웠다.
“저 새끼 뭐예요? 완전 미친놈 아냐? 아놔, 진짜 죽을 뻔했네.”
나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새하얀 얼굴은 이제 핏기 하나 없이 질려 있었다. 영우는 정신이 나간 나를 눈치채고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쌤, 괜찮아요?”
“아니, 응.”
고개를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정신만큼 대답도 뒤죽박죽으로 튀어나왔다.
영우는 ‘아, 어쩌지. 어쩌지.’ 하고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일단 어디로든 가요.”
그러더니 나를 부축하며 오토바이에 다시 태웠다.
영우가 도착한 곳은 교외에 있는 미분양 아파트였다. 허허벌판 위에 지어진 아파트는 미입주 세대가 많아 을씨년스러웠다.
아직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듯 단지 곳곳에 공사 자재가 쌓여 있었고, 아파트 출입문도 설치되지 않아 휑하니 찬바람이 드나들었다.
영우는 자연스럽게 출입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8층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익숙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나에게 손짓했다.
“들어와요.”
한두 번 드나든 게 아닌 듯 행동이 거침없다. 거실로 걸어가던 영우는 엇, 하더니 발끝으로 맥주 캔을 건드리고 멈추어 섰다.
맥주 캔은 또르르 거실 한가운데로 굴러갔다. 거실에는 빈 맥주 캔과 술병들이 뒹굴었다. 아침까지 술판을 벌인 흔적이었다.
“어제 파티를 해서요.”
영우는 맥주 캔을 봉지에 주섬주섬 담으며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말로는 아는 선배 소유의 빈 아파트라는데, 자기들이 아지트 삼아 매일 술판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소파 구석에는 손바닥만 한 여자 팬티도 끼어 있었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영우는 재빨리 속옷을 쑥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영우는 내 눈치를 보는 모양인데, 나는 딱히 뭐라 할 생각이 없었다. 방황해도 언제든 재출발할 수 있다는 게 가진 자들의 특권이니까.
밤도 늦었고 나머지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영우는 거실 소파에, 그리고 나는 큰방 침대에 씻지도 않고 몸을 누였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 혼자 남고서야 지헌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진작 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나는 정지헌이 싫었지만 떠나기도 두려웠다. 정지헌을 떠나서는 내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이 지경까지 와서야 끝을 보다니. 더 일찍 지헌을 떠났어야 했다. 지헌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거실에서는 영우가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보니 거실 상태는 더 엉망이었다. 차마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 못 본 척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제 나 때문에 봉변당해서 미안한 것도 있고, 잘 곳을 마련해 주어서 고마운 것도 있어서 씻고 나온 영우에게 바로 아침을 차려 주고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 봐도 변변한 재료 없이 달걀 몇 개와 베이컨, 식빵이 전부였다.
프라이팬에 베이컨을 굽고 유통 기한이 간당간당한 식빵을 토스터에 넣었다. 얼추 요리가 끝나고 식탁에 차릴 무렵 현관 벨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욕실을 돌아보았다. 욕실에서는 작게 물소리가 났다. 씻는 중인지 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누구세요?”
묻는 말에도 현관문 너머 불청객은 침묵했다.
“…….”
조그만 도어 뷰어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고장이 난 것인지, 까만 도화지를 갖다 댄 듯 앞이 깜깜했다.
평소 문을 열 때 주의를 기울이는 편은 아니다. 누구세요, 하는 물음과 동시에 문을 연다고 지헌에게 늘 혼나곤 했다. 그런데 낯선 장소가 내게 경계심을 주었다. 문 앞에서 망설이는 내 존재를 알고 있는 듯 벨 소리는 연이어 울리며 나를 재촉했다.
어차피 영우와 같이 있으니 별일 없겠지. 물소리 나는 화장실을 쳐다보다가 안전 고리를 걸고 달칵, 문을 열어 주었다.
“…누구세요?”
손가락 한 마디쯤 문이 열리고, 그 조그만 문틈 사이로 지헌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했다. 나는 아연해서 말을 더듬었다.
“여긴 어떻게….”
잠시 넋이 나갔다가 뒤늦게 사색이 된 얼굴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 지헌은 재빨리 문틈에 발을 끼우고 팍, 하고 난폭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안전 고리는 굉음과 함께 장난감처럼 부서졌다.
“악.”
놀라서 주춤 뒤로 몸을 피했다. 지헌은 나를 지나쳐 구둣발로 뚜벅뚜벅 거실로 들어갔다.
나는 뒤늦게 지헌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지헌은 식탁 위에 차려진 2인분의 음식과 물소리가 나는 욕실과 소파에 뒹구는 콘돔 포장지를 살벌하게 훑어보았다.
“…….”
나는 긴장한 눈으로 지헌을 주시했다. 침착하게 담배를 입에 무는 지헌이 불안했다. 극단으로 치닫기 전의 어떤 전조처럼 느껴졌다. 베란다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역으로 받아 세세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지헌은 그 상태로 우두커니 서서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 새끼하고 잤어?”
하, 순간 긴장한 와중에도 헛웃음이 터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쫓아와서 묻는 말이 고작 저거였다. 나는 이 순간이 정지헌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잤냐고 묻잖아.”
핏발 선 얼굴로 추궁하는 말에 불현듯 독기가 치민다.
“그래, 잤어.”
지헌의 잔뜩 굳은 얼굴에 쩡쩡 금이 간다. 그 얼굴에 대고 나는 조소했다.
“못 잘 이유 없잖아.”
지헌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지헌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무섭도록 차분해진 얼굴로 베란다 너머를 응시했다. 그리고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영우가 조용히 지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지헌이 고개를 돌렸을 땐, 번개같이 붙어 주먹을 날린 뒤였다. 퍽 소리와 함께 지헌이 쓰러졌다.
말리기도 전에 잔뜩 긴장한 영우는 다시 지헌에게 달려들어 배 속 깊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지헌은 주먹이 날아오는 대로 가만히 맞기만 했다. 전혀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반격의 의지가 없는 사람을 영우는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이 새끼, 이 새끼! 이 미친놈!”
“그만, 그만해.”
뒤늦게 영우를 말리며 지헌에게서 뜯어냈다. 영우는 몇 번 더 화풀이처럼 발길질을 날리고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쌤, 괜찮아요? 저 새끼 뭐예요?”
흥분한 영우가 당장 경찰에 신고하자고 난리 치고 나는 그걸 말리느라 입씨름하는 사이, 바닥에 누워 있던 지헌이 쿨럭, 피를 토하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누가 봐도 피해자는 지헌이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경찰은 안 돼. 그냥 보내.”
“먼저 무단 침입 한 건 저 새끼잖아요. 이건, 이건 정당방위였다고요!”
영우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정당방위는 없어. 영화 속에만 나오는 말이야. 10 대 1로 싸워 봐라. 정당방위가 나오나. 쟤 부축해서 얼른 내보내.”
영화 속 시체 은닉을 도모하는 범죄자처럼, 우리는 피투성이가 된 지헌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했다.
한쪽 무릎은 쭉 펴고 한쪽 무릎은 세운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지헌은 퉷! 하고 거실 바닥에 피를 뱉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쌤, 이리 오세요.”
영우가 지헌을 경계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지헌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지헌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어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거칠게 닦아 냈다. 지헌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핏방울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
나는 연신 불안한 얼굴로 지헌을 확인하며 영우를 설득했다.
“쟤 신고하면 넌 무사한 줄 알아? 너 미성년자 아냐. 경찰은 절대 안 돼.”
“그럼 어차피 신고 안 할 거, 저 새끼 좀 더 패도 돼요? 어제 일로 쌓인 게 많아서요.”
영우가 훅 입으로 바람을 불며 손목을 우두둑 꺾었다.
정지헌이 지금 살짝 충격받아서 정신이 나간 상태라 일부러 맞아 준 거지, 제대로 둘이 붙으면 영우는 절대 승산이 없었다.
예쁘장한 얼굴 뒤에 감추어진 냉혹한 성정과 단단한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헌의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치워 버리려는 내 마음도 모르고, 영우는 허세나 부리고 있었다. 나는 지헌을 신경 쓰며 빠르게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쟤 빨리 밖으로 끌어내.”
지헌이 부엌에서 나오는 모습이 언뜻 보였는데 어느새 영우 바로 뒤에 있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영우도 내 표정을 보고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경고는 늦었다. 지헌이 번개같이 영우에게 달라붙었다. 둘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같이 베란다로 돌진했다. 육중한 몸이 베란다 유리창에 쿵, 하고 부딪히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무너져 내렸다.
한데 엉겨 붙어서 쓰러진 그들의 몸 위로 커다란 유리 조각이 단두대 칼날처럼 후두득 떨어져 내렸다.
긴 옷을 입은 지헌보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영우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영우의 온몸에는 칼날처럼 유리 조각이 박혔다.
나는 비명이 터질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돌아 버렸구나. 드디어 돌아 버렸어.'
병증 같은 집착을 생각하면 언제 사고 쳐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그래도 정지헌을 믿었다. 지헌의 인간성을 믿은 게 아니라, 잃을 게 많은 지헌의 처지를 믿었다. 그의 집안, 인생, 그동안 쌓아 온 것들을 쉽게 내다 버리진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내 착각이었다.
“너, 너….”
영우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과 지헌을 번갈아 보다가 ‘이, 시팔.’ 하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눈에 초점이 흐리고 움직임은 느렸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기우뚱 넘어간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유리 잔해가 다시금 영우의 온몸에 박혔다.
“우, 움직이지 마!”
나는 기겁하며 영우를 막아섰다.
“선새… 도망….”
그 와중에도 영우는 내게 말하려 애썼다. 그때마다 상처를 틀어막은 영우의 손가락 틈으로 울컥울컥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뒤늦게 영우에게 달려들어 손에 잡히는 대로 쏟아지는 피를 틀어막으며 정신없이 울부짖었다.
“119, 119 좀 불러 줘! 제발 부탁이야!”
티셔츠를 흠뻑 적시고 바닥에 쏟아지는 붉은 피가 너무 무서웠다.
지헌은 그를 경계하며 바짝 붙어 앉은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마를 찡그린 채 절뚝절뚝 다가왔다. 지헌도 영우만큼이나 피투성이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영우의 앞을 막아서며 지헌을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헌은 얼굴로 흘러내리는 피를 슥 닦아 내고 피 묻은 손을 내게 뻗으며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게 말했다.
“얼마나 찾아다녔다고. 이리 와. 이제 집에 가야지.”
나는 아연해서 지헌을 보았다.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걸 모르겠어?”
몸을 떨면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이러면 너는 제대로 못 살아. 제발 이러지 마. 너 어쩌려고 이래…. 도대체 어쩌려고.”
피 웅덩이 위에 누운 영우는 이제 미동이 없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 가는 얼굴이 나를 두렵게 했다.
우리가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피투성이가 된 지헌의 몰골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참담하고 그냥 죽고 싶었다.
모순되게도 망가진 지헌을 보고 가슴 아파할 만큼의 마음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헌은 울면서 애원하는 나를 무덤덤하게 응시하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 내고 절뚝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얼른 집에 가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 섬뜩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지헌이 다가오는 만큼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다가오던 지헌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무서워?”
왜 무섭지? 의아해하는 얼굴이 답답하고 무섭고 미치도록 숨이 막혔다.
“아니. 싫어. 무서운 게 아니라 싫은 거야.”
눈물을 쏟아 내며 오열했다.
지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붉게 충혈된 눈에 처음으로 상처받은 빛이 감돌았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을 옥죄었다.
“이렇게 잘해 주는데, 왜 싫어? 말해 봐.”
“…….”
“말해 보라고!”
절망 어린 목소리가 채찍처럼 나를 후려쳤다. 나는 지헌의 앞으로 기어가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눈물범벅으로 애원했다.
“미안해…. 나, 너 이용한 거야. 용서해 줘.”
“…….”
“네가 돈도 많고 인맥도 넓고,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너 이용한 거라고.”
“알아.”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내가 괜찮다잖아. 그러니까 계속 이용하라고.”
“…….”
할 말을 잃었다.
가끔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인제 보니 정신과에 가 봐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지헌이었다. 저건 정상이 아니다. 사랑도, 뭣도 아니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에 기이하게 뒤틀려 나를 괴롭히는 것뿐이다.
“제발 부탁이야. 이제 그만해.”
정말 지쳤다. 마음과 육신에 한 톨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탁이라고, 그만해 달라고, 영혼이 나간 얼굴로 연신 읊조렸다.
지헌은 그런 나를 붙들고 추궁했다.
“조금도 좋았던 적이 없었어?”
“…….”
“그건 아니지? 응?”
얼굴을 일그러뜨린 지헌이 정신없이 나를 흔들었다.
처음 만날 땐 밝은 햇빛 아래서 사랑만 받고 자란 건강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위태롭고 음울하고 뒤틀려 보였다. 그 얼굴을 계속 마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뒷걸음질 치며 점점 구석으로 몰렸다.
“그래도 너도 나 조금은 좋아했지?”
“…….”
“응? 괜찮아, 말해 봐.”
내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지헌은 더 집요해졌다. 내 얼굴을 정신없이 뜯어보며 혹시 조금의 희망이 있을까 애정을 갈구했다.
광기 어린 지헌의 집착에, 보답받지 못하는 그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지긋지긋했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지겹고 넌덜머리가 나.”
이러면 안 되는데, 그만 말해야지, 하는데 입이 멈추지 않는다. 한번 터진 입은 제멋대로 마구 말을 토해 냈다.
“속으로 내내 역겹다고 생각했어. 단 한 순간도 좋았던 적이 없었어. 끔찍했어!”
“…….”
“이제 됐니?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혀. 너만 보면, 나는 죽고 싶어. 그냥 죽고 싶은 마음뿐이야.”
넋이 나간 지헌의 얼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얼굴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
익숙한 필체로 쓰인 ‘정지헌’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나는 매번 평정을 잃었다.
언제쯤이면 익숙해질까. 한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지그시 짚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건 애리에게 갖는 부채 의식과 비슷하면서 조금은 다른 감정이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특성상, 여기저기서 지헌의 소식은 들려왔고 지헌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쉬웠다.
처음 지헌의 흔적을 발견한 건 학원 강사가 돌린 모범 답안지에서였다.
그날은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신없이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종일 가슴이 쿵쿵 뛰었다.
헤어지고 한동안은 길에서 닮은 사람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익숙한 차만 봐도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비 오는 날 학원을 무심코 나서다가 정문에 지헌과 비슷한 우산을 들고 있는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편의점으로 피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분명 헤어졌는데, 그러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난 언제쯤 지헌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워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왔다.
모의고사를 앞두고 막판 정리를 해야 하는데 한번 붕 뜬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늘 열공하시는 모습이….’ 어쩌고로 시작되는 사물함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읽지도 않고 손안에 구겨 버리고, 방음 안 되는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쾅! 쾅!
가방을 내려놓는 조그만 소음에도 옆방에서 신경질적으로 벽을 두드렸다.
맞은편 방의 남자는 내가 드나들 때마다 문구멍으로 몰래 훔쳐봤다. 얼마 전 없어진 속옷도 맞은편 방 남자의 짓이 분명했다.
나는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견뎌 냈다.
지헌을 버리고 내가 얻은 건 뭐였을까. 그때 꼭 정지헌을 떠나야 했을까. 틈만 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헌과 헤어지고 생리가 끊겼다. 그걸 몇 달이 지나고서야 알아채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을 놓고 살다 뒤늦게 허겁지겁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의사는 초조한 내 눈빛을 보며 한심한 얼굴로 임신이 아니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 순간 안도하는 내가 역겨웠다.
자리에 누웠지만, 마음이 뒤숭숭해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모의고사 날이라 일찍 자야 하는데 이런 날은 잠이 드는 것도 두려웠다.
지헌의 흔적을 발견한 날은 꼭 마지막으로 본 피투성이 얼굴이 떠오르고, 그런 날은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바닥에 쓰러진 영우를 내가 오열하며 감싸 안고, 그런 우리 둘을 지헌이 참담하고 서운하고 초라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장면이 꿈속에서 내내 되풀이됐다. 그리고 깨어나면 얼굴이 눈물로 흥건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헌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내려앉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쓰러진 영우에게 정신이 빼앗겨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왜 지금에서야 보이는 걸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는 말걸, 괜찮냐고 한마디 해 줄걸, 못 해 준 것들만 생각나 가슴에 사무친다.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지헌의 소식을 물어물어 경찰서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헌은 면회 거부로 응답했다.
그때 만약 지헌이 나를 만나 주었다면 울면서 내 마음을 고백했을 것 같다.
지헌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열등감에 지헌에게 끌렸던 마음을 부정했던 비겁하고 못난 마음. 불행했던 가정 환경 탓인지, 자라면서 경험한 남자들 탓인지, 나는 사랑을 믿지도 않고 사랑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지헌은 내게 경쟁 상대였다. 그러니 지헌에게 받는 혜택은 내게 화대처럼 느껴졌다.
지헌을 이용해 살아남고 싶으면서 그런 식으로 도움받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고, 때때로 자괴감에 휩싸였다.
나의 혼란과 모순조차 지헌은 모두 넉넉히 감싸 주었다.
한참 뒤 지헌이 잘 합의했고 곧 유학을 떠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야 다시는 지헌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완전히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내게는 끝이 아니었다.
지헌이 떠나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지헌에게 얽매여 고통받고 있었다.
지헌을 지우려고 노력할수록 그는 내 안에서 기형적으로 커졌다.
영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평생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가 되지 않을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거친 숨소리가 이어지더니 지헌은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열 있는 것 같아. 너무 뜨거워. 이거 진짜 안에 넣고 하는 기분이잖아.”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그거였구나. 평소보다 열이 올라 입 속이 뜨거웠고 그게 몹시 자극적이었나 보다.
지헌은 정신없이 쾌락에 빠진 얼굴로 내 뒷머리를 붙잡고 허리를 들썩였다.
“하아… 하… 흐읍.”
입 안을 아래쪽 촉감처럼 느끼며 흥분하는 모습에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변태 새끼.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뜨겁게 박동하는 성기를 입에서 뱉어 냈다.
한껏 달아오르게 하고 중간에 멈추자 지헌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나는 울컥한 마음을 삼키고 내키지 않은 애무를 이어 갔다. 손으로 위아래로 쓰다듬고 엄지손가락으로 우묵하게 파인 곳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계속해. 응… 그래.”
“있지. 나 부탁이 있는데.”
지헌이 쾌락에 완전히 젖어 들었을 때쯤 슬며시 입을 떼었다.
“카드 말고 현금으로 쓰고 싶어.”
나른하게 젖혀진 고개가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왔다. 욕정에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왜?”
“그냥 답답해.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다 마음먹기 나름이야.”
“카드 두고 나가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가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어. 내가 짐 덩어리 같고 아무 쓸모 없이 느껴져.”
“왜, 도망가게?”
시무룩해서 하는 말에 지헌이 피식 웃으며 장난처럼 받았다.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번득 들었다.
“뭐?”
“농담이야.”
지헌은 하하 웃으며 마저 하라는 듯 내 뒷머리를 잡고 다리 사이로 지그시 눌렀다. 나는 애써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성기 끝만 살짝 입에 물었다. 그러나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하는 시늉만 낼 뿐 머릿속이 복잡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아. 속옷 좀 벗어 봐. 가슴에 대고 문지르게.”
지헌은 이미 대화에서 빠져나와 열락에 빠져들었다. 나는 딴생각을 하느라 지헌의 말을 놓치고 되물었다.
“…뭐?”
“생각 없는 사람 옆구리 찔렀으면 책임져야지. 왜 자꾸 모른 척이야.”
지헌은 웃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왠지 불길해 보이는 미소였다.
지헌은 셔츠를 뒤로 벗기고 브래지어 호크를 풀어내었다. 부드럽고 탄력 있어 보이는 가슴은 흘러내리는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가끔 지헌이 만져 보고 싶게 생긴 몸이라고 침대에서 하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봐도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지헌의 시선은 더욱 음욕에 차올랐다. 지헌은 부풀어 오른 성기를 잡고 끈적한 액체를 윤활유 삼아 가슴에 대고 거침없이 문질렀다.
“발기했어, 네 젖꼭지.”
분명 지헌의 말대로 젖꼭지는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지헌이 비벼 댈수록 빨간 봉우리는 굵게 자라났다.
“열심히 빨아 준 보람이 있어.”
지헌은 짓궂게 웃으며 발기한 끝끼리 서로 비벼 대고 가슴골에 성기를 끼우면서 상스럽게 욕구를 채워 갔다.
지헌의 음란함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잠자리에서 빼는 편은 아니었다. 둘 다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 침대에서 한계는 없었다.
지헌과는 모든 것을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즐길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쾌락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으흣.”
마음껏 가지고 놀았는지 얼마 안 있어 가슴골에 대고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하얗고 말랑한 살결 위로 정액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게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온몸이 기진맥진했다. 지헌이 건네주는 휴지를 손으로 밀어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올 때까지 지헌은 침대 위에서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날아온 말이 나를 붙잡았다.
“이거였어?”
“뭐?”
지헌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보란 듯이 내게 들어 보였다. 한 푼 두 푼 모아 온 내 통장이었다.
“내 돈이야. 이리 내놔.”
눈이 뒤집혀서 지헌에게 달려들었다. 지헌은 기를 쓰고 통장을 뺏으려 드는 나를 한쪽 팔로 여유 있게 붙잡았다.
“정우라고 고등학교 동창인데 우리 학교 경영학과 다니거든. 너한테 중고 책을 샀다는 거야. 다른 과 애들한테 팔면 모를 줄 알았어?”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들켰다는 마음 이전에 내게 조금의 자유도 주지 않는 지헌에게 화가 치밀었다.
지헌은 통장을 열어 금액을 읽으며 비죽하게 웃었다.
“60만 원? 눈물 나네. 어쩐지 매일같이 서점에서 카드값이 찍히더라. 그걸 중고로 팔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러곤 칼날 같은 눈빛을 내게 돌렸다.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분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헛짓하고 다니는 걸 알면서 너의 행복만을 바란다느니 개소리를 늘어놓고, 일부러 나를 떠보고 농락한 지헌에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내 눈물에도 지헌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완고한 얼굴로 취조를 이어 갔다.
“이거 모아서 뭐 하려고?”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면 북받치기 시작한 설움에 더욱 크게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울음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지 않았다.
지헌은 나를 구속하려 했고 폭군처럼 강압적으로 굴었다. 당연하게 나에 대한 권리와 독점을 주장했다. 지헌에 대한 나의 화는 정당했다. 그걸 나만 알고 지헌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도 지헌의 성기는 반쯤 일어서 있었다. 그게 미치도록 징그러웠다.
막 샤워 후 물기 젖은 머리칼과 하얀 목덜미를 훑는 눈에 욕정이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나를 침대로 쓰러트리고 발기한 성기를 내게 쑤셔 넣을 것만 같았다.
나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지헌은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욕정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시종일관 당당했다.
“이런데 내가 뭘 믿고 너한테 현금을 줘. 그리고 기분 더러우니까 앞으로 침대에서 거래하듯이 돈 얘기 꺼내지 마.”
차갑게 내뱉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툭, 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가 뭔데. 도대체 네가 뭔데.
울분이 치솟아 견딜 수 없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두꺼운 책을 집어 들어 화장실 문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퍽, 소리가 들리고 화장실 문이 크게 울렸지만, 안에서 반응은 없었다.
그게 더 열받게 했다. 연이어 두 권, 세 권 문을 향해 책을 집어 던지고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돈 갖고 날 휘두른 건 너잖아! 이 역겨운 놈아! 제발 나 좀 놔줘, 나 좀 놔 달라고!”
달칵 화장실 문이 열리고 무서운 얼굴의 지헌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나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지헌은 한 손으로 나를 낚아채서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저항하는 내 몸을 강하게 포박하고 몸을 겹쳐 왔다. 무릎이 억지로 구부려 올려지고 지헌의 성기는 몸속 깊은 곳에 박혀 들었다. 그 상태로 지헌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흐읍. 후으, 후으.”
“흐윽… 흑.”
찌걱찌걱 살 부딪히는 소리와 지헌의 거친 숨결과 나의 흐느끼는 소리가 뒤엉켰다. 북받치는 설움에 가슴이 콱 막혀 흐느껴 울었다. 관자놀이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 내 귀에 대고 지헌은 거친 숨을 쏟아 내었다.
“왜, 사람 단물만 빼먹고 내빼시려고?”
“흐읏… 흑.”
“포기해. 안 그럼 너만 힘들어. 난 너한테 흥미 안 떨어졌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내 도움 받고 살라고. 어려운 거 아니잖아?”
등 뒤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른 숨소리를 유지하며 눈을 뜨지 않았다. 혼자 남겨지길 기다리는데 별안간 목덜미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다. 지헌이 내게 키스하던 자세 그대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에 자는 척하면 나갈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 허를 찌른다. 일부러 자는 척한 걸 알고 그런 짓을 한 게 분명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축축한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저 지긋지긋한 놈.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괴롭혀.
어제도 밤새도록 사람을 들들 볶아 댔다. 마지막 기억이 욕실에서 씻을 때였는데 벌써 다음 날 오후였다. 폭풍 같은 밤이 무색하게 지헌은 느긋했다. 나는 방패막이처럼 이불을 꽉 쥐고 지헌을 노려보았다.
지헌은 질색하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너는 잘 때가 제일 예쁘다’ 이딴 말을 툭 내뱉고 방을 나갔다.
별 거지 같은 말을 다 들어 보겠네. 잘 때가 제일 예쁜데 깨어 있는 사람을 붙잡고 주야장천 발정하냐?
지헌이 사라진 쪽을 노려보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간밤에 지헌은 나를 확실히 꺾어 놓았다. 이제는 내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는 이미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때까지 정지헌과 이러고 지지고 볶고 살 것 같다. 지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우리 기분 전환하게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우울해져 있는 내게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물어 왔다. 간밤의 일은 지헌에게 기분 전환으로 잊힐 사소한 일이었다.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 뭘 물어봐.”
“…….”
“내 말이 틀려? 결국 다 네 뜻대로 할 거잖아.”
언성이 높아진다. 지헌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네가 피해자처럼 굴어? 어처구니없어서 지헌을 노려보았다.
“너 기분 안 좋으니까 바람 좀 쐬고 오자는 거야. 갔다 와서 어제 내가 말한 자료 줄게.”
이게 정지헌 수법이다. 내가 고집을 피울 때마다 지헌은 내 목줄을 틀어쥐고 어르고 달래면서 길들이려 했다.
이불을 덮어쓰고 시위했지만 계속되는 지헌의 회유에 결국 집을 나섰다.
차 안에는 내내 불편한 침묵만 맴돌았다. 나는 음식점에 도착할 때까지 지헌을 외면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지헌도 굳이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멈추어 서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뭐 먹고 싶냐고 묻기에 한정식만 빼면 다 좋다고, 갈 데 없으면 레스토랑이나 가든지, 했는데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정원이 예쁜 한정식집이었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그런 것만 좋아하니까 네가 자꾸 골골대는 거야. 건강에 좋은 거 먹어.”
차에서 내린 지헌이 성큼성큼 돌아서 내 쪽 차 문을 열었다.
“내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집스레 정면만 응시했다. 나를 위해 준다면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결국 다 자기 마음대로였다.
지헌은 훅, 하고 숨을 내쉬며 차 안으로 쓱 고개를 밀어 넣었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내려.”
나는 고개를 돌려 반항심 어린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단단한 눈동자가 코앞에서 반짝인다.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뒤섞였다. 지헌의 시선은 내 입술을 향해 있었다.
“키스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그러곤 실제로 키스할 듯 바짝 다가왔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차에서 내려 성질껏 문을 쾅 닫았다. 생각보다 큰 굉음에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뭐야, 깜짝이야.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나 실컷 먹어.”
침을 뱉듯 말하고 휙 돌아서는데 지헌이 내 팔을 붙잡았다.
“너 진짜….”
“어머, 너 지헌이 아니니?”
지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였다. 지헌은 험악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들려다 주춤하며 아주머니에게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안녕하셨어요.”
“응, 오늘 여기서 모임 있잖아. 너희 엄마도 있는데… 잠깐만, 여기 지헌이 있어요.”
아주머니는 멀리 서 있는 일행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 말에 곱게 단장한 아주머니가 지헌을 알아보는 눈치더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지헌과 나는 대치하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서서 눈을 마주쳤다.
‘어떡할 거야.’
낭패 어린 얼굴로 지헌에게 눈짓했다. 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은 다가오는 아주머니에게 향한 채 내게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러게 내리랄 때 내리면 좋았잖아. 왜 소란스럽게 만들어 사람들 이목을 끌어.”
그사이에 아주머니는 성큼 우리 앞에 당도했다. 아마도 지헌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지헌은 나를 등 뒤에 숨기고 쓱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으응, 오늘 모임이 있어서.”
아주머니는 지헌에게 건성으로 답하며 시선은 나를 향했다. 세세히 뜯어보는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다.
나는 불편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릎 안 좋다면서 병원은 다녀오셨어요?”
지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며 아주머니 어깨를 감싸고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건 됐고, 여긴 누구…?”
그러나 아주머니가 지헌의 팔을 밀어내고 넌지시 나를 가리키자, 지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치워 나를 아주머니 앞에 노출했다.
“…제 일행이에요. 밥 먹으려고 왔어요.”
깽판 칠까.
순간 생각이 스쳐 갔다. 그러나 아무 죄 없는 지헌의 부모님 앞에서 패악을 떨 자신은 없었다. 나에게 그런 봉변을 당하시기에는 너무 고운 분이셨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아가씨가 전에 말한 그 아가씨지?”
‘전에 말한’이 귀에 걸렸다. 나를 알고 있어? 곧바로 지헌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네, 하고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게 생겼네. 아가씨, 반가워요.”
아주머니가 내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생각보다 큰 환대에 나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친근하게 내 손을 토닥였다.
“웃으니까 더 보기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데이트 잘해.”
아주머니는 지헌에게 한마디 던지고 일행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헌과 나도 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입맛이 없다. 화낼 타이밍은 지나갔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까 일을 곱씹다가 문득 지헌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날 아셔?”
“알지, 왜 몰라.”
지헌이 젓가락을 내 앞에 놔 주며 대답했다.
“네가 말씀드렸어?”
“이미 알고 계셨어.”
지헌이 잠시 멈칫하며 대답했다. 그제야 저번 학교에서의 사건이 지헌의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승아 언니가 지헌이 사촌이니까.
생각보다 큰 사건의 여파가 곤혹스러웠다.
“별말씀 안 하셨어.”
“내 사정 다 아는데도 좋다고 하셨다고?”
“승아 누나가 많이 도와줬어. 뭐, 허락 안 해도 상관없고. 안 보고 살면 그만이야.”
“미쳤구나.”
“그래,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너 데려오지 않았어.”
되레 당당히 나오는 지헌에게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냥 모든 걸 다 물리고 싶었다. 지헌의 집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무작정 집에서 뛰쳐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지헌과 가볍게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모든 게 다 후회되는 일투성이다. 이렇게 골치 아파질 줄이야.
지헌은 이미 아까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 줄줄이 나오는 코스 요리 중에 맛있는 것만 골라서 내 앞 접시에 놔 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모양 예쁜 거로 신중히 고르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몇 점 주워 먹었는데 그게 얹혔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먹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지헌은 작게 혀를 찼다.
'너 아직도 포기 못 했구나, 그래서 네가 자꾸 아픈 거야.'
지헌의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지헌은 왜 자꾸 내가 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리석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자 그나마 숨통 트이는 기분이었다.
비가 그친 정원이 꽤 운치 있었다. 연잎에 고인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걸 보면서 지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고운 외모에 온몸에 교양이 넘쳐흘렀다. 평생 고난을 모르신 분 같다. 그 점은 지헌과 비슷했다. 지헌도 평생 좌절이라는 단어를 모를 것 같았으니까.
발길을 돌려서 다시 가게 안으로 향했다.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인 복도를 헤매는데 문득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근데 애가 좀 청승맞아 보이지 않아?”
지헌의 어머니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아주머니들이 좌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요즘 애 같지 않게 얌전해 보여서 나는 좋던데? 학교도 지헌이랑 같다고 하지 않았어?”
“응, 지헌이가 공부시키고 있나 봐. 똑똑한 애니까 공부는 시켜 주려고. 지헌이 할아버지도 성에 차지는 않는 눈치인데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공부도 잘하고 참하고 똑똑하고 그럼 됐지. 왜, 집안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도 못사는 집에서 며느리 데려와야 집안이 편해. 잘사는 집 애들은 실속이 없어. 내조는 영 꽝이야.”
“맞아요. 오히려 똑똑하고 친정 뒷배 약한 저런 애가 나아요. 잘사는 집 애 데려와 봤자 사치도 심하고, 못살아야 시댁 눈치도 보고 휘두르기 편하죠.”
“네, 좋게 생각해요. 친정이 어려우니까 애가 말은 잘 듣겠던데요. 딱 봐도 고분고분하잖아요. 잘사는 집 애 데려와 봐요. 불편해요. 우리 집 며느리는 아빠가 장관이라고 애가 어찌나 공주처럼 곱게 자랐는지 비위 맞추기 힘들어요. 아주 손가락 까닥 안 하고 상전이 따로 없다니까요. 제가 눈치 보고 살잖아요. 이래서 며느리는 낮은 데서 데려오라고 하나 봐요. 그래야 큰소리치고 살죠.”
“그렇지? 그래도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고 대학 온 거 보면 애는 똑바른 거 같아.”
엄마들은 본능적으로 자식에게 해가 될 사람을 아는 걸까. 지헌의 어머니는 연신 애는 똑바르다고. 그거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 뒤로도 아주머니들은 나에 대한 세세한 품평을 이어 갔다. 당황해서 얼버무리듯 인사하고 지나갔는데 어찌나 첫인상은 좋게들 보셨는지, 예쁘고 똑똑하고 얌전하고 참해 보이고. 그 좋은 말씀들 뒤에는 부려 먹기 쉽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생각해 보면 딱히 나쁜 분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내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시고, 좋은 말씀만 하셨다.
어차피 나도 지헌이 어머니 앞에서 떳떳한 입장은 못 되었다. 지헌의 어머니가 내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걸까. 집에서 나올 때는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만 해결되면 지헌과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 일을 겪으니까 자존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헌이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둘이 결혼시킬까 생각 중이야. 저렇게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 그래야 우리 지헌이도 마음먹고 공부에 집중하지.”
“그래, 아예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여유 있을 때 둘이 결혼시키면 되겠네. 지헌이 할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시다며. 돌아가시기 전에 지헌이 결혼하는 모습 보시면 좋지.”
더 이상 듣다못해 돌아서는데 화장실에 갔다 왔는지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해요?”
아주머니는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의아하게 보면서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룸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 지헌이 여자 친구 왔는데, 못 들어가고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네.”
“아니요, 저….”
급히 만류하는데 이미 아주머니들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방금 전까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그중에 한 아주머니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잠깐 이리 들어와요. 안 그래도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 해서 아쉬웠는데.”
“아닙니다. 복도에서 길을 잃어서 잘못 찾았습니다. 지헌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지헌이 어머니는 내가 이해 간다는 듯이 친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금은 자리가 좀 어렵지요? 다음에 지헌이하고 같이 집에서 편하게 봐요.”
“네. 말씀 나누세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유, 참한 거 봐. 지헌이 엄마는 참 좋겠어.”
“여차하면 그냥 지헌이 내조시켜도 되겠어. 뭐 하러 고생스럽게 공부시켜.”
아주머니들은 내가 돌아서기 무섭게 나를 칭찬했다. 문득 이렇게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서는 내가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근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뭔데 그래요?”
아주머니들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안 보고 살면 그만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기 위해 지헌이 애를 많이 썼다는 걸 알고 있다. 나도 지헌에게 일말의 미안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넘어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전 지헌이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시기에는 더더욱이요.”
지헌이 어머니가 당혹스러운 듯 물어 왔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우리 지헌이는 아가씨하고 이미 얘기 다 됐다고 하던데?”
“전 모르는 일이에요.”
“아가씨 말은 지금 우리 지헌이 혼자 아가씨 좋다고 따라다닌다는 거예요?”
말끝에 강한 불쾌감이 실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도 노기가 드러났다. 주위 사람들도 일순 조용해져서 지헌의 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제 지헌과는 영원히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니 지헌도 별로 입맛이 없는지 상 위에 음식은 그대로였다. 지헌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매를 찌푸리며 이마를 만졌다.
“너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그냥 속이 좀 안 좋아.”
지헌의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지헌은 나를 부축해서 차 안으로 데려갔다. 어머니들이 있는 방에서 잘 보이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운전하면서 지헌은 간간이 나를 흘끔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창밖 풍경만 눈에 담았다.
“친정 뒷배 약한 애.”
“부려 먹기 좋은 애.”
“지헌이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둘이 결혼시킬까 생각 중이야.”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거부할수록 지헌은 더욱 맹렬해져서 내가 도망갈 퇴로를 하나씩 차단시켰다. 지헌과 동거하면서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갑자기 지헌이 욕을 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폭주족들은 유독 지헌의 외제 차를 노렸다. 두셋씩 떼를 지어 아슬아슬하게 지헌의 차에 붙었다가 지헌의 앞으로 위험하게 휙 껴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지헌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급브레이크를 밟고, 급히 고개를 돌려 내 안색을 확인했다.
“괜찮아?”
“차, 차 좀 세워 봐.”
괴로운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간신히 울렁거리는 속을 참고 있었는데 거친 운전에 속이 뒤집혔다.
지헌은 주위를 살피며 급히 차를 정차시켰다. 차가 갓길에 멈추자마자 나는 문을 열고 구르듯 튀어나와 왈칵 속을 게워 냈다. 어떻게 제지할 틈도 없이 꾸역꾸역 토사물이 쏟아졌다.
지헌은 급히 운전석을 빠져나와 내 등을 토닥였다. 먹은 것이 없어서 구역질해도 더는 넘어오는 게 없었다.
나는 도로 턱에 축 늘어진 채 주저앉았다. 식도가 긁힌 것처럼 따끔거리고 온몸이 기진맥진했다.
“기다려. 물 사 올게.”
지헌은 재킷을 내 어깨에 덮어 주고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계산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지헌은 줄 끝에 서서 초조한 눈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그때 폭주족들이 편의점 근처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농담을 던지고 낄낄대며 헬멧을 벗었다. 고등학생 정도 될까? 다들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그중에 한 명을 발견하고 뭐에 홀린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달려가듯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출발해.”
폭주족 중에 익숙한 사람의 오토바이에 무작정 올라타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딱히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대책 없이 일을 저질렀다.
놀란 영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예요, 쌤? 얼굴이 왜 그래요?”
“빨리, 빨리.”
급히 재촉하며 불안한 얼굴로 뒤를 흘깃거렸다. 지헌이 무서운 얼굴로 편의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제발!”
소스라치게 놀라 지르는 비명에 영우는 채찍이라도 맞은 듯 후다닥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영우도 백미러를 흘끔 확인하며 나를 잡으러 오는 지헌을 눈치챈 듯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중얼거리며 영우가 정신없이 오토바이 페달을 밟았다. 시동이 걸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지헌이 나를 낚아챌 것만 같아 심장이 조여들었다.
오토바이가 총알같이 튀어 나가고 동시에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뒤를 확인했다. 성큼성큼 내게 오던 지헌이 급히 방향을 틀어 차를 향해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도로 위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영우는 폭주족으로 꽤 거침이 없었는데, 지헌도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잔뜩 독이 올라서 우리를 쫓아왔다.
너무 가깝게 따라붙어서 고개를 돌리면 분노 어린 지헌과 눈이 마주쳤다. 꼭지가 확 돌아서 이성을 잃은 게 느껴졌다.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대로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심장이 죄여 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영우의 허리를 꼭 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지헌은 양쪽 차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우리를 추격했다. 범상치 않은 기색에 주위 차들조차 최대한 속도를 늦추거나 차선을 변경하며 지헌의 차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덕분에 지헌은 더 수월하게 우리를 쫓아올 수 있었다.
일단 출발하면 적당히 떨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헌은 위험천만한 곡예 운전을 지속하며 무섭게 따라붙었다.
빵, 하고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이 도로를 가득 울렸다. 영우도 식겁한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뒤에 태운 나 때문에 적당히 조절하면서 운전하는 느낌이었는데, 점점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제는 정말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끼익, 찢어질 듯한 소음과 함께 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골목으로 위험하게 회전을 시도했다.
지헌도 즉각 거칠게 핸들을 틀며 옆 차선으로 뛰어들었다. 이어서 끼익, 하고 급정거하는 차들로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나마 주위 차들이 방어 운전을 하고 있어서 심각한 추돌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엉망이 된 차들 속에 갇혀 지헌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골목을 지나 한참을 달리고서야 영우는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와 씨, 진짜 장난 아니네.”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식겁해서 한마디 뱉고 나를 보고 핏대를 세웠다.
“저 새끼 뭐예요? 완전 미친놈 아냐? 아놔, 진짜 죽을 뻔했네.”
나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새하얀 얼굴은 이제 핏기 하나 없이 질려 있었다. 영우는 정신이 나간 나를 눈치채고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쌤, 괜찮아요?”
“아니, 응.”
고개를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정신만큼 대답도 뒤죽박죽으로 튀어나왔다.
영우는 ‘아, 어쩌지. 어쩌지.’ 하고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일단 어디로든 가요.”
그러더니 나를 부축하며 오토바이에 다시 태웠다.
영우가 도착한 곳은 교외에 있는 미분양 아파트였다. 허허벌판 위에 지어진 아파트는 미입주 세대가 많아 을씨년스러웠다.
아직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듯 단지 곳곳에 공사 자재가 쌓여 있었고, 아파트 출입문도 설치되지 않아 휑하니 찬바람이 드나들었다.
영우는 자연스럽게 출입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8층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익숙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나에게 손짓했다.
“들어와요.”
한두 번 드나든 게 아닌 듯 행동이 거침없다. 거실로 걸어가던 영우는 엇, 하더니 발끝으로 맥주 캔을 건드리고 멈추어 섰다.
맥주 캔은 또르르 거실 한가운데로 굴러갔다. 거실에는 빈 맥주 캔과 술병들이 뒹굴었다. 아침까지 술판을 벌인 흔적이었다.
“어제 파티를 해서요.”
영우는 맥주 캔을 봉지에 주섬주섬 담으며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말로는 아는 선배 소유의 빈 아파트라는데, 자기들이 아지트 삼아 매일 술판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소파 구석에는 손바닥만 한 여자 팬티도 끼어 있었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영우는 재빨리 속옷을 쑥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영우는 내 눈치를 보는 모양인데, 나는 딱히 뭐라 할 생각이 없었다. 방황해도 언제든 재출발할 수 있다는 게 가진 자들의 특권이니까.
밤도 늦었고 나머지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영우는 거실 소파에, 그리고 나는 큰방 침대에 씻지도 않고 몸을 누였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 혼자 남고서야 지헌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진작 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나는 정지헌이 싫었지만 떠나기도 두려웠다. 정지헌을 떠나서는 내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이 지경까지 와서야 끝을 보다니. 더 일찍 지헌을 떠났어야 했다. 지헌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거실에서는 영우가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보니 거실 상태는 더 엉망이었다. 차마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 못 본 척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제 나 때문에 봉변당해서 미안한 것도 있고, 잘 곳을 마련해 주어서 고마운 것도 있어서 씻고 나온 영우에게 바로 아침을 차려 주고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 봐도 변변한 재료 없이 달걀 몇 개와 베이컨, 식빵이 전부였다.
프라이팬에 베이컨을 굽고 유통 기한이 간당간당한 식빵을 토스터에 넣었다. 얼추 요리가 끝나고 식탁에 차릴 무렵 현관 벨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욕실을 돌아보았다. 욕실에서는 작게 물소리가 났다. 씻는 중인지 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누구세요?”
묻는 말에도 현관문 너머 불청객은 침묵했다.
“…….”
조그만 도어 뷰어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고장이 난 것인지, 까만 도화지를 갖다 댄 듯 앞이 깜깜했다.
평소 문을 열 때 주의를 기울이는 편은 아니다. 누구세요, 하는 물음과 동시에 문을 연다고 지헌에게 늘 혼나곤 했다. 그런데 낯선 장소가 내게 경계심을 주었다. 문 앞에서 망설이는 내 존재를 알고 있는 듯 벨 소리는 연이어 울리며 나를 재촉했다.
어차피 영우와 같이 있으니 별일 없겠지. 물소리 나는 화장실을 쳐다보다가 안전 고리를 걸고 달칵, 문을 열어 주었다.
“…누구세요?”
손가락 한 마디쯤 문이 열리고, 그 조그만 문틈 사이로 지헌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했다. 나는 아연해서 말을 더듬었다.
“여긴 어떻게….”
잠시 넋이 나갔다가 뒤늦게 사색이 된 얼굴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 지헌은 재빨리 문틈에 발을 끼우고 팍, 하고 난폭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안전 고리는 굉음과 함께 장난감처럼 부서졌다.
“악.”
놀라서 주춤 뒤로 몸을 피했다. 지헌은 나를 지나쳐 구둣발로 뚜벅뚜벅 거실로 들어갔다.
나는 뒤늦게 지헌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지헌은 식탁 위에 차려진 2인분의 음식과 물소리가 나는 욕실과 소파에 뒹구는 콘돔 포장지를 살벌하게 훑어보았다.
“…….”
나는 긴장한 눈으로 지헌을 주시했다. 침착하게 담배를 입에 무는 지헌이 불안했다. 극단으로 치닫기 전의 어떤 전조처럼 느껴졌다. 베란다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역으로 받아 세세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지헌은 그 상태로 우두커니 서서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 새끼하고 잤어?”
하, 순간 긴장한 와중에도 헛웃음이 터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쫓아와서 묻는 말이 고작 저거였다. 나는 이 순간이 정지헌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잤냐고 묻잖아.”
핏발 선 얼굴로 추궁하는 말에 불현듯 독기가 치민다.
“그래, 잤어.”
지헌의 잔뜩 굳은 얼굴에 쩡쩡 금이 간다. 그 얼굴에 대고 나는 조소했다.
“못 잘 이유 없잖아.”
지헌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지헌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무섭도록 차분해진 얼굴로 베란다 너머를 응시했다. 그리고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영우가 조용히 지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지헌이 고개를 돌렸을 땐, 번개같이 붙어 주먹을 날린 뒤였다. 퍽 소리와 함께 지헌이 쓰러졌다.
말리기도 전에 잔뜩 긴장한 영우는 다시 지헌에게 달려들어 배 속 깊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지헌은 주먹이 날아오는 대로 가만히 맞기만 했다. 전혀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반격의 의지가 없는 사람을 영우는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이 새끼, 이 새끼! 이 미친놈!”
“그만, 그만해.”
뒤늦게 영우를 말리며 지헌에게서 뜯어냈다. 영우는 몇 번 더 화풀이처럼 발길질을 날리고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쌤, 괜찮아요? 저 새끼 뭐예요?”
흥분한 영우가 당장 경찰에 신고하자고 난리 치고 나는 그걸 말리느라 입씨름하는 사이, 바닥에 누워 있던 지헌이 쿨럭, 피를 토하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누가 봐도 피해자는 지헌이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경찰은 안 돼. 그냥 보내.”
“먼저 무단 침입 한 건 저 새끼잖아요. 이건, 이건 정당방위였다고요!”
영우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정당방위는 없어. 영화 속에만 나오는 말이야. 10 대 1로 싸워 봐라. 정당방위가 나오나. 쟤 부축해서 얼른 내보내.”
영화 속 시체 은닉을 도모하는 범죄자처럼, 우리는 피투성이가 된 지헌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했다.
한쪽 무릎은 쭉 펴고 한쪽 무릎은 세운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지헌은 퉷! 하고 거실 바닥에 피를 뱉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쌤, 이리 오세요.”
영우가 지헌을 경계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지헌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지헌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어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거칠게 닦아 냈다. 지헌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핏방울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
나는 연신 불안한 얼굴로 지헌을 확인하며 영우를 설득했다.
“쟤 신고하면 넌 무사한 줄 알아? 너 미성년자 아냐. 경찰은 절대 안 돼.”
“그럼 어차피 신고 안 할 거, 저 새끼 좀 더 패도 돼요? 어제 일로 쌓인 게 많아서요.”
영우가 훅 입으로 바람을 불며 손목을 우두둑 꺾었다.
정지헌이 지금 살짝 충격받아서 정신이 나간 상태라 일부러 맞아 준 거지, 제대로 둘이 붙으면 영우는 절대 승산이 없었다.
예쁘장한 얼굴 뒤에 감추어진 냉혹한 성정과 단단한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헌의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치워 버리려는 내 마음도 모르고, 영우는 허세나 부리고 있었다. 나는 지헌을 신경 쓰며 빠르게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쟤 빨리 밖으로 끌어내.”
지헌이 부엌에서 나오는 모습이 언뜻 보였는데 어느새 영우 바로 뒤에 있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영우도 내 표정을 보고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경고는 늦었다. 지헌이 번개같이 영우에게 달라붙었다. 둘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같이 베란다로 돌진했다. 육중한 몸이 베란다 유리창에 쿵, 하고 부딪히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무너져 내렸다.
한데 엉겨 붙어서 쓰러진 그들의 몸 위로 커다란 유리 조각이 단두대 칼날처럼 후두득 떨어져 내렸다.
긴 옷을 입은 지헌보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영우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영우의 온몸에는 칼날처럼 유리 조각이 박혔다.
나는 비명이 터질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돌아 버렸구나. 드디어 돌아 버렸어.'
병증 같은 집착을 생각하면 언제 사고 쳐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그래도 정지헌을 믿었다. 지헌의 인간성을 믿은 게 아니라, 잃을 게 많은 지헌의 처지를 믿었다. 그의 집안, 인생, 그동안 쌓아 온 것들을 쉽게 내다 버리진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내 착각이었다.
“너, 너….”
영우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과 지헌을 번갈아 보다가 ‘이, 시팔.’ 하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눈에 초점이 흐리고 움직임은 느렸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기우뚱 넘어간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유리 잔해가 다시금 영우의 온몸에 박혔다.
“우, 움직이지 마!”
나는 기겁하며 영우를 막아섰다.
“선새… 도망….”
그 와중에도 영우는 내게 말하려 애썼다. 그때마다 상처를 틀어막은 영우의 손가락 틈으로 울컥울컥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뒤늦게 영우에게 달려들어 손에 잡히는 대로 쏟아지는 피를 틀어막으며 정신없이 울부짖었다.
“119, 119 좀 불러 줘! 제발 부탁이야!”
티셔츠를 흠뻑 적시고 바닥에 쏟아지는 붉은 피가 너무 무서웠다.
지헌은 그를 경계하며 바짝 붙어 앉은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마를 찡그린 채 절뚝절뚝 다가왔다. 지헌도 영우만큼이나 피투성이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영우의 앞을 막아서며 지헌을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헌은 얼굴로 흘러내리는 피를 슥 닦아 내고 피 묻은 손을 내게 뻗으며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게 말했다.
“얼마나 찾아다녔다고. 이리 와. 이제 집에 가야지.”
나는 아연해서 지헌을 보았다.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걸 모르겠어?”
몸을 떨면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이러면 너는 제대로 못 살아. 제발 이러지 마. 너 어쩌려고 이래…. 도대체 어쩌려고.”
피 웅덩이 위에 누운 영우는 이제 미동이 없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 가는 얼굴이 나를 두렵게 했다.
우리가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피투성이가 된 지헌의 몰골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참담하고 그냥 죽고 싶었다.
모순되게도 망가진 지헌을 보고 가슴 아파할 만큼의 마음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헌은 울면서 애원하는 나를 무덤덤하게 응시하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 내고 절뚝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얼른 집에 가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 섬뜩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지헌이 다가오는 만큼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다가오던 지헌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무서워?”
왜 무섭지? 의아해하는 얼굴이 답답하고 무섭고 미치도록 숨이 막혔다.
“아니. 싫어. 무서운 게 아니라 싫은 거야.”
눈물을 쏟아 내며 오열했다.
지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붉게 충혈된 눈에 처음으로 상처받은 빛이 감돌았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을 옥죄었다.
“이렇게 잘해 주는데, 왜 싫어? 말해 봐.”
“…….”
“말해 보라고!”
절망 어린 목소리가 채찍처럼 나를 후려쳤다. 나는 지헌의 앞으로 기어가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눈물범벅으로 애원했다.
“미안해…. 나, 너 이용한 거야. 용서해 줘.”
“…….”
“네가 돈도 많고 인맥도 넓고,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너 이용한 거라고.”
“알아.”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내가 괜찮다잖아. 그러니까 계속 이용하라고.”
“…….”
할 말을 잃었다.
가끔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인제 보니 정신과에 가 봐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지헌이었다. 저건 정상이 아니다. 사랑도, 뭣도 아니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에 기이하게 뒤틀려 나를 괴롭히는 것뿐이다.
“제발 부탁이야. 이제 그만해.”
정말 지쳤다. 마음과 육신에 한 톨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탁이라고, 그만해 달라고, 영혼이 나간 얼굴로 연신 읊조렸다.
지헌은 그런 나를 붙들고 추궁했다.
“조금도 좋았던 적이 없었어?”
“…….”
“그건 아니지? 응?”
얼굴을 일그러뜨린 지헌이 정신없이 나를 흔들었다.
처음 만날 땐 밝은 햇빛 아래서 사랑만 받고 자란 건강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위태롭고 음울하고 뒤틀려 보였다. 그 얼굴을 계속 마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뒷걸음질 치며 점점 구석으로 몰렸다.
“그래도 너도 나 조금은 좋아했지?”
“…….”
“응? 괜찮아, 말해 봐.”
내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지헌은 더 집요해졌다. 내 얼굴을 정신없이 뜯어보며 혹시 조금의 희망이 있을까 애정을 갈구했다.
광기 어린 지헌의 집착에, 보답받지 못하는 그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지긋지긋했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지겹고 넌덜머리가 나.”
이러면 안 되는데, 그만 말해야지, 하는데 입이 멈추지 않는다. 한번 터진 입은 제멋대로 마구 말을 토해 냈다.
“속으로 내내 역겹다고 생각했어. 단 한 순간도 좋았던 적이 없었어. 끔찍했어!”
“…….”
“이제 됐니?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혀. 너만 보면, 나는 죽고 싶어. 그냥 죽고 싶은 마음뿐이야.”
넋이 나간 지헌의 얼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얼굴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
익숙한 필체로 쓰인 ‘정지헌’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나는 매번 평정을 잃었다.
언제쯤이면 익숙해질까. 한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지그시 짚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건 애리에게 갖는 부채 의식과 비슷하면서 조금은 다른 감정이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특성상, 여기저기서 지헌의 소식은 들려왔고 지헌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쉬웠다.
처음 지헌의 흔적을 발견한 건 학원 강사가 돌린 모범 답안지에서였다.
그날은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신없이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종일 가슴이 쿵쿵 뛰었다.
헤어지고 한동안은 길에서 닮은 사람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익숙한 차만 봐도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비 오는 날 학원을 무심코 나서다가 정문에 지헌과 비슷한 우산을 들고 있는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편의점으로 피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분명 헤어졌는데, 그러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난 언제쯤 지헌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워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왔다.
모의고사를 앞두고 막판 정리를 해야 하는데 한번 붕 뜬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늘 열공하시는 모습이….’ 어쩌고로 시작되는 사물함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읽지도 않고 손안에 구겨 버리고, 방음 안 되는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쾅! 쾅!
가방을 내려놓는 조그만 소음에도 옆방에서 신경질적으로 벽을 두드렸다.
맞은편 방의 남자는 내가 드나들 때마다 문구멍으로 몰래 훔쳐봤다. 얼마 전 없어진 속옷도 맞은편 방 남자의 짓이 분명했다.
나는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견뎌 냈다.
지헌을 버리고 내가 얻은 건 뭐였을까. 그때 꼭 정지헌을 떠나야 했을까. 틈만 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헌과 헤어지고 생리가 끊겼다. 그걸 몇 달이 지나고서야 알아채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을 놓고 살다 뒤늦게 허겁지겁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의사는 초조한 내 눈빛을 보며 한심한 얼굴로 임신이 아니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 순간 안도하는 내가 역겨웠다.
자리에 누웠지만, 마음이 뒤숭숭해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모의고사 날이라 일찍 자야 하는데 이런 날은 잠이 드는 것도 두려웠다.
지헌의 흔적을 발견한 날은 꼭 마지막으로 본 피투성이 얼굴이 떠오르고, 그런 날은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바닥에 쓰러진 영우를 내가 오열하며 감싸 안고, 그런 우리 둘을 지헌이 참담하고 서운하고 초라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장면이 꿈속에서 내내 되풀이됐다. 그리고 깨어나면 얼굴이 눈물로 흥건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헌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내려앉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쓰러진 영우에게 정신이 빼앗겨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왜 지금에서야 보이는 걸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는 말걸, 괜찮냐고 한마디 해 줄걸, 못 해 준 것들만 생각나 가슴에 사무친다.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지헌의 소식을 물어물어 경찰서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헌은 면회 거부로 응답했다.
그때 만약 지헌이 나를 만나 주었다면 울면서 내 마음을 고백했을 것 같다.
지헌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열등감에 지헌에게 끌렸던 마음을 부정했던 비겁하고 못난 마음. 불행했던 가정 환경 탓인지, 자라면서 경험한 남자들 탓인지, 나는 사랑을 믿지도 않고 사랑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지헌은 내게 경쟁 상대였다. 그러니 지헌에게 받는 혜택은 내게 화대처럼 느껴졌다.
지헌을 이용해 살아남고 싶으면서 그런 식으로 도움받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고, 때때로 자괴감에 휩싸였다.
나의 혼란과 모순조차 지헌은 모두 넉넉히 감싸 주었다.
한참 뒤 지헌이 잘 합의했고 곧 유학을 떠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야 다시는 지헌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완전히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내게는 끝이 아니었다.
지헌이 떠나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지헌에게 얽매여 고통받고 있었다.
지헌을 지우려고 노력할수록 그는 내 안에서 기형적으로 커졌다.
영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평생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가 되지 않을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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