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시트콤 - 2부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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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4장 : 미르의 전설
“미망인이 재산 상속 때문에 시댁식구랑 사이가 안좋다잖아요. 법대생이라구 했으니 실밥이라두 꿰메줄라면 아는게 쬐끔은 있어야 할거 아뇨.”
“그래, 필요가 발명을 부른다는 말이 있더만 이 참에 공부해서 판검사 나리님이나 돼라.”
“거까진 필요없지만 둘러댈라면 쬐끔은 알아야 면장질이라두 할테니까...”
“그런데 행님은 채팅 안하구 뭘하슈?”
“나? 요 옆에 앉은 양반이 문주라고 높은 양반인데, 미르의 전설이라고 들어는 봤냐?”
“나야 채팅밖에 모르죠.”
“무식한 자슥. 거 채팅보다 좋은진 모르지만 PC방 들락거릴라면 겜도 몇갠 알아야지.”
“재밌어요?”
“암, 그냥 칼질만 윙윙 해대면 빨갛구 파란 줄이 왔다갔다하구 번갯불인지 지글지글 타오르고 신기하다.”
“거 노인네가 또 이상한 걸 시작했나보네.”
“문주라는 양반이 레벨업을 해줬는데 첨보단 심심치 않다.”
“근데 웬일루 PC방엘 다 왔수?”
“너도 없는데 혼자서 큰 방에 덩그런히 앉아서 뭐하냐? 그래서 돈 좀 마련해갖고 왔지.”
“얼마있수?”
“삼십분 서있었는데 삼만사천원 되더라.”
“어쿠, 엄청 버셨네.”
“이게 번거냐. 거지짓이지.”
“겜에 맛들였으면 나처럼 튀든지 맨날 그 짓거릴 하든지 양단간에 결정해야겠구만.”
“얼굴에 철판 깔구 그 짓거릴 해야겠다. 여긴 정말 따땃하구 극락이 따로 없구먼.”
“그래서 사람은 자꾸 새로운 걸 찾아봐야한다니까예.”
“그려, 네 놈 덕분에 좋은델 발견해냈으니 컴퓨터 망가진거 한 대만 꼭 구해와라.”
“그건 뭐에 쓸껀데.”
“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궁금할게 뭐있소. 그냥 망가진 컴퓨터는 산업폐기물일 뿐인데.”
“암튼 약속대로 너 나갈 때 철판 깔구 삼십분 서 있었으니까 너두 약속 지키라구.”
“행님이 큰 결심했으니 나두 찾아 볼게.”
“그나저나 너 오늘도 튈꺼냐?”
“일없수. 행님 돈이 삼만원두 넘는다는데 왜 튀냐구.”
“임마, 내 돈이 네 돈이냐?”
“우리 사이가 니돈 내돈 따질 사이요?”
“그래, 옛따 만원이면 뒤집어 쓰고도 남지?”
오그라든 끝을 빳빳하게 펼쳐놓았던 천원짜리 열장을 침을 묻혀가며 두 번은 세어 본 후 철호에게 건네줬다. 철호놈이 후다닥 튀는 버릇만 고치면 세상이 모두 바른생활이 될 것 같아서 아깝지도 않았다.
“행님, 난 요 돈으로 오늘 알밤 깔랍니더.”
“그러냐? 난 새벽 두시쯤 어델 갈데가 있는데 같이 안갈래?”
“한량 보다 더 일없는 양반이 하필이면 새벽 두시?”
“너 일 있을 때 나두 일이 있었거든.”
“엉? 무슨 일?”
“암튼, 생각있음 오천원 다시 돌려줘. 싫으면 혼자서 알밤 까던지.”
“애이 줬다 뺏는게 어딨어예. 그냥 따라가면 안될까?”
“안돼. 법을 공부하겠다는 놈이 엉거주춤 따라 붙어서야 쓰겠나.”
“공부한댔지 언제 했댔어?”
“그게 그거지. 처음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한거다 너.”
“알슈, 여기 오천원 돌려줄테니까 이따 새벽에 날 끼워주슈.”
철호놈이 되돌려준 오천원을 다시 잘 펴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줬다 뺐은것이지만 철호놈 손에 있을 때 보다는 훨씬 맘이 든든한 것이 역시 이놈의 세상은 돈 없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는 세상이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자 아침부터 어설픈 게임에만 정신이 쏠려 있다 보니 한끼도 챙겨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 바람과 싸울 때도 웬만하면 끼니를 놓치지 않았는데 따뜻한 PC방에 들어온지 몇일 됐다고 벌써 정신머리가 밥 먹을 시간도 까먹었는지 한심하다.
“어이, 문주양반. 돈 많이 벌었으면 짜장면이나 시켜 먹자구.”
“생각없어요. 끼니를 놓쳤더니 시장끼가 사라졌거든요.”
“어허, 젊은 양반이 밥도 못챙겨 먹으면 힘을 못써요.”
“밥하구 힘쓰는거하구 무슨 상관이요.”
“저런, 아까 철호놈이 늘씬한 미녀회를 먹고 왔다구 할때 헛물 켜더니만 새벽에 힘 쓸라면 짜장면 한그릇이라도 챙겨 먹어야지.”
“아참, 그렇구나. 이따를 위해서라도 뭘 챙겨 먹자.”
“돈 아까우면 내가 먹는건 내가 낼게. 난 뭐가 맛있는지 몰라서 말야.”
“냅두세요. 짜장 한그릇, 간짜장 한그릇, 짬봉 두그릇, 군만두 한 개면 저기 철호란 사람이랑 구석탱이 명희랑 다 먹을테니까 내가 사죠.”
“좋아, 그럼 새벽 두시에 명희란 여자 방어는 철저하게 해줄게.”
“꼭 방어해야되요. 괜히 영숙이랑 한따까리하는데 쫒아오면 완전 개망신 나니까.”
“걱정 붙들어매놓고 맘껏 놀다와.”
중국집에서 음식배달이 오자 각자 흩어져서 게임을 하던 네 사람이 한 테이블위에 모처럼 모였다. 명희는 멀쑥하게 생긴 철호를 보고 한눈에 뽕가는 느낌인 반면, 철호는 아직도 낮의 일들이 아삼삼한지 정신이 해롱거리는 것이 못 볼 지경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놈의 생활을 하면서 어디 여자 살맛은커녕 가까이에서 냄새나 맡아봤을까 싶은 참에 질탕하게 분탕질을 해 댔으니 이놈의 망상에서 여자가 사라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뻔하다.
“이 놈은 사회에서 사귄 동생 철혼데 친동생보다 더 가깝지. 그리고 여긴 아까 말한대로 내가 속한 문파의 문주님이시고 이름은 김동수씨, 저쪽은 문주님 애인인데 이름이 뭐시더라 아, 김명희, 그리고 난 제일 늙은 김갑수라고 하지.”
“아예, 안녕하세요. 김명희에요.”
“전 박철호라고 합니다.”
“이 PC방엔 첨 오셨나봐요?”
첨 왔을 리가 있나. 거지 꼴로 와선 게임을 줄창 하다가도 아르바이튼가 뭔가 하는 직원이 닭졸 듯이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면 쏜살같이 달아나는 통에 이렇게 멀겋게 해서 나타났으니
얼굴을 서로 못알아 볼 밖에.
“거 형님이 하는 겜은 재밌는거요?”
“아따, 재밌은께 하지.” 김동수가 펄쩍 뛰는 반응을 보였다.
“저도 하면 행님 돕듯이 도와줄수 있어요?”
“난 바쁜사람여. 이 형님이야 워낙 고령자다 보니까 돕게 된거지.”
“난 채팅밖에 모르는데...”
“PC방에서 밤샘 할라믄 겜도 몇 개는 할 줄 알아야제.”
“그래요? 난 이제부터 법이나 공부할 생각인데.”
“법요?”
“왜 법인잖수. 법전인가 뭔가, 두꺼운 책으로 된거.”
“그거 아무나 읽는거 아닐텐데...”
“인터넷으로 주루루 읽으면 다 한글인데 못 읽을게 뭐 있수.”
“예끼 이놈아, 한글 읽는다고 뜻 아냐?”
“아휴 삼십년 가까이 한글만 쓴 놈이 이해 못할껀 또 뭐유.”
“그래, 그래. 용감한 놈이 최고다.”
네 사람은 철호의 철없는 주장에 까르르 웃고 말았다. 커피 한잔을 마셔 본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남이 타주는 것 말고 내 돈을 내고라도 먹어 본 기억이 가물거린다. 진한 커피향이 코 끝에 닿는 순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어느 시절이 갑자기 떠 올랐다. 어린아이. 내게도 분명 아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양옥집. 하얀 피부를 가진 까만 머리의 아낙네. 모든게 낯선 속에서도 나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고서야 커피 향기 끝에 내 머리에 달라 붙지는 않을 것이다. 잊고자 해서 잊었던걸까? 잊어선 안될 것을 잊었던 걸까?
“행님, 뭐 고민되는 일 있수?”
“아냐, 정말 네 놈 말대로 내 기억속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다니까. 행님에겐 잊어버린 시간이 분명 있을꺼라구예.”
“그게 뭔지 몰라. 일부러 잊은건지 잊혀져선 안될 걸 잊은건지.”
“갑자기 그 생각이 왜 떠올랐수?”
“커피향. 이거, 코 끝에 닿으면서 피어 올랐다가 금방 사라졌어. 환상이겠지?”
“그럼 생각말구 잊고 살아봐. 끊어질걸 잇는다고 새것 되는건 아니잖아.”
“그렇겠지?”
“어쩐지 행님을 보면 횡설수설하는 구석이 남들 보다 많더니...”
“내가 많이 그러니?”
“암튼 어떤 땐 근엄하고 듬직하다도 어떤 땐 저런 푼수가 따로 없다 싶기도 하고...”
“그래, 오늘은 그만하자. 또 커피향기를 맡으면 떠오르겠지.”
어깨가 빠질 정도로 칼질을 해 대는 사이에 제법 레벨이 많이 상승했다. 무공이나 마법 같은 것들도 제법 쓸만한 걸로 구사할 지경에 이르자 연합작전에 과감하게 투입되어 큰 몹을 사냥하는 선봉이 되기도 하고 슬쩍 빠져나가 탈진된 피를 보충하는 방법도 알게되었다. 이런 게임은 어떻게 보면 인간들이 사는 방법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조금 무리한 몹을 잡으면 점수를 많이 얻게 되고 만만한 몹만 잡으면 맨날 칼질만 될 뿐이지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도 알겠다. 근거리와 장거리 공격이랑 연합할 때 피가 모자라면 남의 사정 볼 것 없이 슬그머니 줄행랑을 치는 방법이라든지 공격과 방어에 관한 것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경지까진 온 것 같았다. 밤이 깊어 간다. 카운터를 지키던 주인은 어느새 아르바이트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주인은 또 우리가 튈지도 모르는 요주의 인물이라고 귀뜸쯤은 하고 갔을 것 같지만 주머니 속이 든든하니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나 오늘은 집에 들어가봐야 하는데 넌 밤샐꺼니?”
“오빠, 어딜간다고?”
“아까 영희엄마가 눈 흘기고 간거 봤잖아. 아무래도 너랑 썸씽 있는걸 눈치챈 것 같던데.”
“그 언니가 날 알아봤다구?”
“그랬나봐. 오늘 안들어오면 죽인다구 협박했단 말야.”
“씨, 그럼 진작 말해주지. 이 밤중에 나 혼자 뭘 하라구.”
“여기 아저씨 있잖아. 같이 협공하면서 몹 사냥 다니면 재미있을꺼야.”
“아저씬 초보자잖아.”
“예전에 내가 널 도와주듯이 이번엔 네가 아저씰 도와주면 되잖아.”
“대신 난 오빨 좋아했잖아.”
“그럼 아저씨가 널 좋아하면 되는거니?”
“그런 말이 어딨어.”
“초보자를 도와주는건 다 문파를 위해 좋은 일이잖아. 밤 샐꺼면 아저씨랑 같이 하고 있어.”
“싫단 말야. 오빠랑 맥주도 마시고 듬뿍 취할 생각이었는데...”
“어, 명희씨, 술 먹고 싶어?”
“아저씨가 돈 있어요?”
“그럼, 우리 아가씨가 술 먹겠다면 밤 새도록 사줄 돈 정도야 있지.”
“좋아. 그럼 오빤 오늘 언니한테 걸린 것 같다니까 일단 가봐. 대신 다음에 또 그러면 나 죽는꼴 봐야할꺼야.”
“알았어. 알았다구.”
김동수는 영숙과의 만남을 위해 이명희를 나에게 슬그머니 떼어 놓고 PC방을 나섰다. 지긋지긋하게 오랜 시간 몹을 잡느라고 육신이 지끈거리던 나도 생맥주나 한잔 하자며 철호와 명희를 데리고 PC방을 빠져 나왔다. 아마도 PC방 주인은 우리가 돈을 내고 정정당당하게 나선 것을 알면 다음 날 부터는 단골손님 대접하듯이 융숭해질 것이다.
“행님요, 돈 삼만원 갖구 밤새도록 술 먹을 수 있수?”
“쟈슥아, 네가 돈 낸다구 우리가 먼저 나가면 젤 꽁지에 있던 네 놈이 튀면 될꺼아냐.”
“어휴, 술집에서 그딴짓 하단 뼈도 못추린다구요.”
“네놈이 무서운덴 아는 모양이구나. 그런 놈이 PC방을 녹녹하게 보고 튄단 말이지?”
“알바가 맹하면 튀는거죠.”
“그럼 술집 카운터 보는애가 맹하면 튀라구.”
“싫어요. 차라리 난 PC방에 다시 들어가서 맘 편하게 알밤 깔래요.”
“그럴래? 네 놈 생각에도 입 하나라도 줄여야 뼈를 추릴 것 같아서 꽁지 빼는 줄은 알겠다만 너무 약은 것 아닌가 모르겠다.”
“암튼, 통성명 했으니까 딱 한잔만 목 축이고 다시 PC방 들어갈께예.”
철호와 명희와 나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약간 커진 도로변에 늦게 까지 불이켜진 맥주집엘 들어갔다. 초저녁에 먹은 짜장면으로는 아무리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배가 출출한 것 같아 통닭 안주를 시키는게 좋겠다. 생맥주를 시켜 세명이 동시에 건배하자 꿀꺽 들이킨 철호놈은 뒤가 쿠린지 돈이 모자라면 인질로 잡힐까 걱정되는지 꽁지를 내리고 비실비실 걸어서 PC방으로 되돌아갔다.
이명희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왈패같이 생긴 걸로 봐선 아무래도 말술은 먹음직했다. 몇 년동안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던 술을 몸이 잘 받아줄지 의문이라서 명희가 두잔 마실 때 한잔 정도만 마시고 숨을 골라야했다.
“아저씨, 술 안마셔?”
“어, 술 끊은지 꽤 됐었지.”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마시는거야?”
“십년은 족히 됐을꺼야. 한 방울도 못 마신때가.”
“우와, 십년 공든 탑이 나 때문에 무너진거네.”
“그렇지도 않아. 필요하다면 공든 탑이라도 무너뜨려야지.”
“내가 그렇게 안쓰러워 보였던거야?”
“아니라니까. 사실 술이 먹고 싶었거든.”
“십년동안 참았던 술이 왜 마시고 싶어?”
“그게 알수 없단 말야.”
“혹시 날 꼬셔 볼라구 그런거 아냐?”
“그랬구나. 정답이다.”
“흥, 그렇다고 내가 넘어갈까?”
“아니면 말구.”
“좋아, 넘어갔다구 쳐. 근데 어디서 잘껀데?”
“생각 안해봤네.”
“그봐, 아저씬 딱 보니까 무능력해 보였거든.”
“그렇게 보였니?”
“응, 돈도 없어 보이고, 의욕도 없어 보이고, 힘도 없어 보이고.”
“그랬구나. 아마 명희가 제대로 본 것 같아.”
“왜그래? 왜 농담으로 한 얘길 가지고 축 늘어져?”
“사실이니까.”
“그렇게 자신이 없어?”
“응, 자신없어서 숨어 살았지. 십년이 넘도록.”
“뭐 하면서 살았는데?”
“그냥 누구한테도 간섭받지 않는 시간들이었지.”
“그게 가능해?”
“그랬어. 나 스스로도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긴 시간동안 어떤 누구의 간섭도 없었지.”
“천당엘 갔다왔나봐.”
“그게 천당이었구나. 세상 살면서 누구의 간섭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천당이었어.”
“자꾸 비하하지마. 안쓰러 보인다.”
“그래, 용기를 내자, 힘을 내 보자. 잊어버린 과거도 찾자.”
“좋았어. 아저씨가 힘을 낸다니까 나도 기분이 조금 좋아지네.”
“명희야 너 계속 술 먹을꺼니?”
“아니, 추워.”
“넌 집이 없니?”
“있어. 하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아.”
“왜?”
“맨날 쌈질만 했거든. 엄마랑 아빠랑 쌈질, 공포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고 이렇게 PC방에서만 겉돌면 명희 앞날이 뭐가 되겠니?”
“집에 들어간다고 잘 될 것도 없거든. 그냥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 만으로 행복해.”
“동수 오빠는 어떻게 만났어?”
“그 오빤 돈 많이 벌어. 아이템 팔구 돈 벌면 나 한테두 잘 쓰거든.”
“넌 돈 없구?”
“아니, 나두 아이템 많이 팔아서 이젠 돈도 꽤 있지.”
“명희가 편히 쉴 그런 안식처는 아직 없는거야?”
“응, 하지만 동수오빠가 금방 이혼할 것처럼 말했으니까 거기가 내 집될꺼야.”
“명희야, 그건 꿈도 꾸지마. 그 오빤 널 사랑하지 않거든.”
“무슨소리야? 그 오빤 나 없으면 못 산다구 얼마나 많이 말했었는데.”
“그건 입에 침도 안바르고 해 대는 남자들의 미사어구일 뿐이야.”
“난 어떻게 되는건데?”
“너 스스로를 찾아야지. 동수 오빠를 의지하면 할수록 넌 더욱 비참해지기만 할꺼야.”
“그런 느낌은 들었지만 아저씨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
“동수라는 사람, 집에 간게 아니야. 영숙이라는 여잘 만나러 갔으니까.”
“머? 정말?”
“여자 몇 명이 더 있는 것 같거든.”
“아이 왕짜증. 뭐 그딴 오빠가 다 있지?”
“이젠 명희야,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
“싫어, 내가 뭘하든 관심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명희 나이가 스물셋쯤 됐지?”
“응, 어떻게 알았어?”
“명희가 어리광을 부리면서도 이런 저런 생각 속에 사리 밝음이 보였거든.”
“그걸루 나이를 맞춘거야?”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보는 눈은 정확해지거든.”
“집 나온지 벌써 이년짼데 들어가면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아냐, 엄마 아빠가 널 무척 사랑하게 될꺼야.”
“아저씬 정말 우리 아빠같다.”
“그렇게 보이니?”
“응, 내가 웬만하면 반말 안하거든. 근데 아저씨한텐 반말이 쑥쑥 튀어나오잖아.”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명희야.”
“아저씨, 나 추워.”
“이렇게 추운날 맥주를 마셔대면 더 춥잖니. 우리 PC방으로 다시 돌아갈까?”
“아니, 술먹고 PC방 가는 건 애들이 싫어하거든.”
“그럼 어떻하지?”
“저기 모텔에 갈 돈 있어?”
“글쎄다, 나도 돈이 많지는 않거든.”
“얼마 있어?”
“음,,, 술값내고 나면 오만원쯤?”
“그럼 됐다. 저긴 사만원이구 또 저긴 오만원이거든.”
“너 정말 많이 아는구나?”
“자주 다니는데 뭐.”
“창피하지 않았니?”
“요즘 돈 떨어져서 못갔지만 방값 아직 안올랐으면 저긴 될꺼야.”
내가 술값을 계산하는 동안 명희가 먼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내 손에 쥐어진 돈으로 정당하게 어떤 댓가를 지불해 본 것이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맨날 얻어먹으며 일생을 탕진했던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세상을 정말 가치있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일상으로 여기며 사는 것과 똑같은 행동양식으로 그들이 지불하는 댓가만큼 나도 그 댓가를 지불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첫 번째 단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명희가 앞장서서 들어간 곳에 카운터 아가씨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꽤 됐는지 오가는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는 밤이었다. 차가운 칼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밤에 젊은 영혼과 늙은 영혼이 하루밤 안식을 찾아 남들이 수없이 이용하던 모텔이라는 방문을 난생 처음으로 열어 본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싶다. 삼년쯤 묵혔던 때 덩어리가 이까짓 물줄기에 말끔히 씻겨내릴수는 없겠지만 손에 힘을 주어 박박 비누거품을 일으키며 온 몸을 닦아내고 있다. 아침에 철호놈이 깊숙이 감춰뒀던 칫솔로 누런 이빨을 바글바글 닦아내듯이 나도 일회용 칫솔에 듬뿜 치약을 묻혀 바글바글 이빨을 닦고 있다. 누렇게 탈색된 속옷 속에서 무던히도 땀내와 몸내가 묻어날텐데 뜨거운 탕 속에 휘휘 저어 세상의 온갖 탈속의 때를 떼어내고 있다.
명희가 곤히 내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딸 보다 더 어린 명희를 가슴에 안아들며 한 때 행복했었던 기억이 가물거리는 추억 속으로 나를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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