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 - 3부6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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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지훈과 만나기 위해서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려 긴 속눈썹을 더욱 강조하고 눈썹화장을 마쳤다. 입술엔 요염한 짙은 붉은 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지훈이 좋아하는 화려하고 진한 메이크업이었다. 은은한 펄이 들어간 글로스를 덧발랐다. 한층 더 화려해진 인상이었다. 화장을 할수록 거울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또 한사람의 자신으로…. 희성이가 모르는 또 다른 자신..
‘잘 어울린다니까. 밝힌다는 이미지가 잘 드러나잖아? 지금 유미한테 딱이야 딱! 이제부턴 그 얼굴로 나를 즐겁게 하는 거야’
처음은 그런 지훈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지훈이와 만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 음란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싫은 누군가가 되기로 했다. 출구가 없는 힘든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은 스스로 그런 화장을 했다. 청초하고 자연스러운 화장만 해오던 유미가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메이크업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이미 오전 9시를 지나 있었다. 지훈이를 만나야 하는 날에 이 시간까지 호출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인가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불려나가 지훈의 아파트에서, 러브호텔의 한 방에서, 골목길 어느 빌딩의 비상계단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해왔었다. 그게 당연한 하루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시간까지….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어딘가 텅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희성이를 만났었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왔다. 지훈을 만날 때마다 지훈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지훈의 강한 조교에 순응하는 몸처럼 언젠가는 마음마저 그렇게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혼자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희성이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직접 얼굴을 볼 용기는 없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라도…. 며칠 전, 잠든 얼굴을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먼 발치에서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에 학교에 들렀었다. 하지만 교정의 한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만 희성과 마주치고 말았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싸안은채 유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마주치자 마자 머리속이 새하얘졌었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자신을 믿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남자친구를 잊어버리고 육욕에 빠져 들었었던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자신이 비참하게만 느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뛰어서 도망치고 말았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희성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희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이야기 하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뛰어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또 심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최악이었다. 차라리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오후가 되어도 지훈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희성의 집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오후 무렵의 조용한 집안에서 벽에 걸린 시게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저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식탁에 없드려 언제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지금.. 지훈이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깜짝 놀랐다. 시계바늘은 이제 막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든든한 몸이, 쾌락에 빠져 포로가 되고 만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더 이상 희성을 배반하는 일은…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몸 깊은 곳에서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뜨거운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지훈이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몸을 쓰다듬던 지훈의 단단한 손길이, 가슴을 덮어오던 넓은 지훈의 가슴이, 몸 깊은 곳까지 용서없이 뚫고 들어오던 뜨거운 그 무엇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럴 리가 없어야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읽고 있던 원서를 펼쳤다. 다른 생각을 하려면 할수록 지훈이를 생각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누나한테 접근했던 건… 그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지훈이 자신을 안는 건 복수의 게임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불러내는 건 희성이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공원에서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유미한테.. 내 여자한테…그 따위 짓을… 죽여버리겠어”
지훈이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을 지켜주었다.
‘내 소중한…’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중년남자를 쫓아낸 후 지훈은 유미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을 입기를 기다려 말없이 안아왔었다. 떨림이 남아 있던 유미의 몸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 안았었다. 그 모습은 치욕의 한게를 추구하던 평소의 지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답이 보이질 않았다. 유미는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같은 자리만을 맴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와 같이 골랐던 희성의 방의 커튼을 흔들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곧 어둠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으으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고 움직인 순간 맨살에 입은 스웨터가 가슴을 스치자 달콤한 자극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후우… 싫어.. 이런…”
자신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가 일어서 있었다. 지훈을 만나지 않고 있어도 자신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유미의 몸은 지훈의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지훈이 새겨놓은 계명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쾌락의 늪으로 유미를 이끌고 있었다. 처음엔 미약한 아픔과 위화감만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서서히 달콤한 자극으로 바뀌어가고, 쌓여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유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고 또 다시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입력 미스였나…?”
희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대형 디스플레이에서는 몇가지의 3D그래픽과 에러메시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프로젝트의 준비에 정신이 없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연구실에 들러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는 유전자 해석 시뮬레이션의 세밀도를 높이기 위해 단말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는 단순한 미스였다. 또 처음부터 다시 입력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집중력이 떨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 곧 프로젝트가 시작될 터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가운을 입은채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희성이 저녀석.. 엄청 망가진 거 같지 않아?”
“아무리 저 녀석이 아님 진행되지 않는 연구라고는 해도.. 계속 일만 하잖아.. 게다가.. 너도 들었지? 그 소문…”
“아.. 응.. 들었어.. 그 여자친구 얘기지? 다들 알고 있던데?”
“심하지 않냐? 완전히 좆된 거 같던데?”
“그럼 그게 정말이었던 거야? 그렇게 사이 좋아 보이더니..”
“그런가봐.. 희성일 보라고.. 저렇게 기운이 없잖아”
“나 같으면 절대 용서 못한다”
같은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흘려 들으며 복사기의 잼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복사기를 뜯어보던 지영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학부생을 붙들고는 고쳐놓으라는 말만 던져 놓고 희성이 사라진 쪽으로 종종 걸음을 걸었다.
“저.. 저기 선생님, 저.. 다음 수업 있는데요?”
이학부 연구동의 옆에 있는 작은 야외 휴게실. 희성은 벤치에 앉아 정문으로 이어지는 가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판기가 놓여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지붕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그곳은 완전 금연인 연구동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흡연자들의 집합장소였다. 최근들어 희성이가 자주 들르는 장소기도 했다.
앞으로 1주일뒤면 12월도 끝이 난다. 해가 바뀌고 있었다. 자켓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나왔던 탓에 얼어붙는 것 같은 북풍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에는 비나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운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불을 붙였다.
“우욱~ 콜록 콜록”
몇번을 피워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침을 하고 있는 희성의 손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뭐야.. 이런 거 나 피우고.. 그만 둬”
“아.. 선생님”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담배나 찾고…”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면서 지영이 물어왔다.
“아뇨.. 특별히 이유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갈라지고 작은 목소리였다. 지영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었다.
“그럼 더 끊어야겠네..그리고 말야.. 그 어떤 일도 무리를 해서는 안돼. 가끔은 쉬어주지 않으면.. 초조하거나 서둘러서는 잘 될일도 잘 되지 않으니까 말이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희성이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지영이가 걱정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 희성의 입장에서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지만 유미에 관한 일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고 나서부터는 유미에게만 그의 속마음을 내보여 왔었다. 유미도 희성이에게만은 만들어지지 않은 진실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힘들때나 어려울 때면 언제나 유미의 웃는 얼굴과 따뜻함으로 위로를 받아 왔었다. 희성이에게 있어서 유미만이 특별한 존재였다.
지금의 희성이로써는 지영의 따뜻한 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영에게 기대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었다.
어제 바로 이 장소에서 유미를 보았었다. 우연이었다. 언제나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지내기가 힘들어서, 혼자 있고 싶어서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눈 앞에 유미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유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유미는 놀란 얼굴이었다. 겁먹은 표정마저 띄우고 서둘러서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유미가 ���째서….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다리가 땅이 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유미가 자신의 부름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j다.
그 모습 뒤로 지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자친구를 빼앗기고도, 비웃음을 사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너무나도 사무쳤다. 이대로라면 유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 하면….
이어지는 출장 탓에 외박이 이어졌고, 연구실에서의 철야작업도 늘었다. 유미를 만날 시간을 만들기는커녕 집에 갈 시간 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단 한순간도 유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걱정스러웠다. 걱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지훈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그저 손을 놓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하고 있을지.. 무사히 있을지.. 유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지훈이로부터 구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했다.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던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어서 통화버튼을 누르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집에 돌아가 보면 빨래는 정리되어 있었다. 청소도 되어 있었고, 옷장 안의 옷들도 겨울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을 유미가 해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며칠 전 새벽에 집에 들렀을 때 유미가 자신의 배개를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유미는 옆에 없었지만 그녀가 만들어 둔 아침상이 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지 못해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아직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것이 충격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지훈이 자신과 만나지 말라고 시켰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자신은 결심하지 않았던가.. 유미를 믿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바로 옆에 지영이 앉아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희성은 불안감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옆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지영이 침묵을 깼다.
“그런데 말야 희성아..”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희성은 입을 다문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전에 얘기했던 거.. 생각 좀 해봤니?”
이미 지혜로부터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었다. 이전 연구실에서 희성과 유미의 섹스를 훔쳐보던 지훈이라는 남자 아이가 지혜와 짜고서 희성이로부터 유미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유미를 생각대로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희성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 등 대략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아직 몇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여기보다 설비도 잘 되어 있고 너처럼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아.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는 좋은 자극이 될 거야”
“후우~”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듯한 희성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영은 말을 이었다.
“내년 봄부터 나… 이학연구센터의 XX 지부에 연구실을 만들기로 했어. 여기도 그렇고 거기도 그렇고.. 혼자서는 전부 다 살펴볼 수 없잖아. 그래서 말야 T공대쪽을 희성이한테 맡길까 싶거든..”
“그.. 그런.. 제가.. 더구나 아직…”
“학점은 거의 다 따두었잖아. 적은 여기에 두고 졸업논문은 거기서 쓰면 될 거야. 어차피 심사는 내가 하잖아. 희성이면 뭐 논문통과가 안될리도 없고..”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 지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없는 게.. 희성이 너한테도 편할 거 같아서 말이야..”
“좀 더.. 시간을 주세요”
식어있는 커피를 비운 후 희성은 그렇게 대답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이였다.
“많이 기다렸나?”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아르바이트에 관한 얘기라던가 시험에 관한 얘기 등 아무래도 좋을만한 이야기 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나와’라는 짧은 명령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지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치 조건반사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훈의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화가 끊겼다.
“유미..나오고 싶나?”
“……!”
강한 말투였다.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분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답이 없지? 나오고 싶냐고 물었는데?”
“…네…”
목이 메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맥박이 빨라졌다.
“… 안기고 싶나?”
그랬던 것이다. 지훈은 그저 자신을 애태우고,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훈의 의도를 알고나서도, 자신이 또 당하고 만 것을 알아차리고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네…”
쾌락의 파도에 휩쓸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지훈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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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과 만나기 위해서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려 긴 속눈썹을 더욱 강조하고 눈썹화장을 마쳤다. 입술엔 요염한 짙은 붉은 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지훈이 좋아하는 화려하고 진한 메이크업이었다. 은은한 펄이 들어간 글로스를 덧발랐다. 한층 더 화려해진 인상이었다. 화장을 할수록 거울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또 한사람의 자신으로…. 희성이가 모르는 또 다른 자신..
‘잘 어울린다니까. 밝힌다는 이미지가 잘 드러나잖아? 지금 유미한테 딱이야 딱! 이제부턴 그 얼굴로 나를 즐겁게 하는 거야’
처음은 그런 지훈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지훈이와 만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 음란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싫은 누군가가 되기로 했다. 출구가 없는 힘든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은 스스로 그런 화장을 했다. 청초하고 자연스러운 화장만 해오던 유미가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메이크업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이미 오전 9시를 지나 있었다. 지훈이를 만나야 하는 날에 이 시간까지 호출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인가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불려나가 지훈의 아파트에서, 러브호텔의 한 방에서, 골목길 어느 빌딩의 비상계단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해왔었다. 그게 당연한 하루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시간까지….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어딘가 텅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희성이를 만났었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왔다. 지훈을 만날 때마다 지훈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지훈의 강한 조교에 순응하는 몸처럼 언젠가는 마음마저 그렇게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혼자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희성이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직접 얼굴을 볼 용기는 없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라도…. 며칠 전, 잠든 얼굴을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먼 발치에서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에 학교에 들렀었다. 하지만 교정의 한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만 희성과 마주치고 말았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싸안은채 유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마주치자 마자 머리속이 새하얘졌었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자신을 믿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남자친구를 잊어버리고 육욕에 빠져 들었었던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자신이 비참하게만 느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뛰어서 도망치고 말았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희성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희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이야기 하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뛰어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또 심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최악이었다. 차라리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오후가 되어도 지훈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희성의 집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오후 무렵의 조용한 집안에서 벽에 걸린 시게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저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식탁에 없드려 언제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지금.. 지훈이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깜짝 놀랐다. 시계바늘은 이제 막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든든한 몸이, 쾌락에 빠져 포로가 되고 만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더 이상 희성을 배반하는 일은…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몸 깊은 곳에서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뜨거운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지훈이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몸을 쓰다듬던 지훈의 단단한 손길이, 가슴을 덮어오던 넓은 지훈의 가슴이, 몸 깊은 곳까지 용서없이 뚫고 들어오던 뜨거운 그 무엇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럴 리가 없어야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읽고 있던 원서를 펼쳤다. 다른 생각을 하려면 할수록 지훈이를 생각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누나한테 접근했던 건… 그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지훈이 자신을 안는 건 복수의 게임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불러내는 건 희성이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공원에서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유미한테.. 내 여자한테…그 따위 짓을… 죽여버리겠어”
지훈이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을 지켜주었다.
‘내 소중한…’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중년남자를 쫓아낸 후 지훈은 유미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을 입기를 기다려 말없이 안아왔었다. 떨림이 남아 있던 유미의 몸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 안았었다. 그 모습은 치욕의 한게를 추구하던 평소의 지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답이 보이질 않았다. 유미는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같은 자리만을 맴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와 같이 골랐던 희성의 방의 커튼을 흔들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곧 어둠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으으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고 움직인 순간 맨살에 입은 스웨터가 가슴을 스치자 달콤한 자극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후우… 싫어.. 이런…”
자신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가 일어서 있었다. 지훈을 만나지 않고 있어도 자신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유미의 몸은 지훈의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지훈이 새겨놓은 계명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쾌락의 늪으로 유미를 이끌고 있었다. 처음엔 미약한 아픔과 위화감만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서서히 달콤한 자극으로 바뀌어가고, 쌓여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유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고 또 다시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입력 미스였나…?”
희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대형 디스플레이에서는 몇가지의 3D그래픽과 에러메시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프로젝트의 준비에 정신이 없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연구실에 들러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는 유전자 해석 시뮬레이션의 세밀도를 높이기 위해 단말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는 단순한 미스였다. 또 처음부터 다시 입력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집중력이 떨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 곧 프로젝트가 시작될 터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가운을 입은채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희성이 저녀석.. 엄청 망가진 거 같지 않아?”
“아무리 저 녀석이 아님 진행되지 않는 연구라고는 해도.. 계속 일만 하잖아.. 게다가.. 너도 들었지? 그 소문…”
“아.. 응.. 들었어.. 그 여자친구 얘기지? 다들 알고 있던데?”
“심하지 않냐? 완전히 좆된 거 같던데?”
“그럼 그게 정말이었던 거야? 그렇게 사이 좋아 보이더니..”
“그런가봐.. 희성일 보라고.. 저렇게 기운이 없잖아”
“나 같으면 절대 용서 못한다”
같은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흘려 들으며 복사기의 잼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복사기를 뜯어보던 지영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학부생을 붙들고는 고쳐놓으라는 말만 던져 놓고 희성이 사라진 쪽으로 종종 걸음을 걸었다.
“저.. 저기 선생님, 저.. 다음 수업 있는데요?”
이학부 연구동의 옆에 있는 작은 야외 휴게실. 희성은 벤치에 앉아 정문으로 이어지는 가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판기가 놓여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지붕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그곳은 완전 금연인 연구동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흡연자들의 집합장소였다. 최근들어 희성이가 자주 들르는 장소기도 했다.
앞으로 1주일뒤면 12월도 끝이 난다. 해가 바뀌고 있었다. 자켓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나왔던 탓에 얼어붙는 것 같은 북풍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에는 비나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운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불을 붙였다.
“우욱~ 콜록 콜록”
몇번을 피워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침을 하고 있는 희성의 손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뭐야.. 이런 거 나 피우고.. 그만 둬”
“아.. 선생님”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담배나 찾고…”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면서 지영이 물어왔다.
“아뇨.. 특별히 이유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갈라지고 작은 목소리였다. 지영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었다.
“그럼 더 끊어야겠네..그리고 말야.. 그 어떤 일도 무리를 해서는 안돼. 가끔은 쉬어주지 않으면.. 초조하거나 서둘러서는 잘 될일도 잘 되지 않으니까 말이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희성이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지영이가 걱정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 희성의 입장에서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지만 유미에 관한 일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고 나서부터는 유미에게만 그의 속마음을 내보여 왔었다. 유미도 희성이에게만은 만들어지지 않은 진실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힘들때나 어려울 때면 언제나 유미의 웃는 얼굴과 따뜻함으로 위로를 받아 왔었다. 희성이에게 있어서 유미만이 특별한 존재였다.
지금의 희성이로써는 지영의 따뜻한 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영에게 기대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었다.
어제 바로 이 장소에서 유미를 보았었다. 우연이었다. 언제나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지내기가 힘들어서, 혼자 있고 싶어서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눈 앞에 유미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유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유미는 놀란 얼굴이었다. 겁먹은 표정마저 띄우고 서둘러서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유미가 ���째서….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다리가 땅이 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유미가 자신의 부름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j다.
그 모습 뒤로 지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자친구를 빼앗기고도, 비웃음을 사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너무나도 사무쳤다. 이대로라면 유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 하면….
이어지는 출장 탓에 외박이 이어졌고, 연구실에서의 철야작업도 늘었다. 유미를 만날 시간을 만들기는커녕 집에 갈 시간 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단 한순간도 유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걱정스러웠다. 걱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지훈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그저 손을 놓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하고 있을지.. 무사히 있을지.. 유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지훈이로부터 구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했다.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던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어서 통화버튼을 누르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집에 돌아가 보면 빨래는 정리되어 있었다. 청소도 되어 있었고, 옷장 안의 옷들도 겨울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을 유미가 해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며칠 전 새벽에 집에 들렀을 때 유미가 자신의 배개를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유미는 옆에 없었지만 그녀가 만들어 둔 아침상이 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지 못해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아직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것이 충격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지훈이 자신과 만나지 말라고 시켰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자신은 결심하지 않았던가.. 유미를 믿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바로 옆에 지영이 앉아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희성은 불안감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옆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지영이 침묵을 깼다.
“그런데 말야 희성아..”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희성은 입을 다문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전에 얘기했던 거.. 생각 좀 해봤니?”
이미 지혜로부터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었다. 이전 연구실에서 희성과 유미의 섹스를 훔쳐보던 지훈이라는 남자 아이가 지혜와 짜고서 희성이로부터 유미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유미를 생각대로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희성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 등 대략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아직 몇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여기보다 설비도 잘 되어 있고 너처럼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아.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는 좋은 자극이 될 거야”
“후우~”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듯한 희성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영은 말을 이었다.
“내년 봄부터 나… 이학연구센터의 XX 지부에 연구실을 만들기로 했어. 여기도 그렇고 거기도 그렇고.. 혼자서는 전부 다 살펴볼 수 없잖아. 그래서 말야 T공대쪽을 희성이한테 맡길까 싶거든..”
“그.. 그런.. 제가.. 더구나 아직…”
“학점은 거의 다 따두었잖아. 적은 여기에 두고 졸업논문은 거기서 쓰면 될 거야. 어차피 심사는 내가 하잖아. 희성이면 뭐 논문통과가 안될리도 없고..”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 지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없는 게.. 희성이 너한테도 편할 거 같아서 말이야..”
“좀 더.. 시간을 주세요”
식어있는 커피를 비운 후 희성은 그렇게 대답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이였다.
“많이 기다렸나?”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아르바이트에 관한 얘기라던가 시험에 관한 얘기 등 아무래도 좋을만한 이야기 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나와’라는 짧은 명령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지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치 조건반사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훈의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화가 끊겼다.
“유미..나오고 싶나?”
“……!”
강한 말투였다.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분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답이 없지? 나오고 싶냐고 물었는데?”
“…네…”
목이 메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맥박이 빨라졌다.
“… 안기고 싶나?”
그랬던 것이다. 지훈은 그저 자신을 애태우고,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훈의 의도를 알고나서도, 자신이 또 당하고 만 것을 알아차리고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네…”
쾌락의 파도에 휩쓸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지훈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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