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 - 4부4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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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무슨 절이네..”
“응.. 어두워졌으니까.. 발 밑을 잘 보고 걸어…”
희성은 익숙한 듯한 걸음으로 암자의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런 희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유미가 바로 뒤를 붙어서 따라 걸었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좁은 계단이 놓여져 있었다. 석등과 돌난간이 이어지는 급경사의 계단을 한발씩 확인해 나가면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불빛이 없어서 상당히 어두웠지만 유미는 신기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씻겨내려가는 듯한 그런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곳에 암자가 있었네…”
“응 이 암자가 이 절의 본전이래. 아래에 있던 곳은 그냥.. 손님 맞이용이고… 여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한.. 그런 사람들의 슬픈사연들이 있는 그런 암자.. 옛날부터 이어지지 않았던 영혼들을 기리기 위한 암자라는 거 같아. 그렇게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조사하려고 민속학자였던 아버지가 이곳에 와서. 엄마를 만났던 모양이야. 유미야.. 이리 와봐.. 유미가 봐줬으면 하던 게 바로 여기거든…”
“민속학자? 하지만…”
유미는 희성의 아버지가 평범한 회사원인줄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회사도 다니고 있었고, 회사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도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디. 출판사의 영업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민속학자였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여기야.. 유미야”
작은 암자의 옆을 따라 잡풀을 헤치며 10미터 정도 앞으로 들어가자 잡초가 잘 치워진 작은 공간이 나왔다. 키 작은 나무들로 둘러쌓인 그곳에 아무 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사각형의 돌이 놓여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키작은 나무, 마치 비석 같은 사각형의 돌.. 설마… 하는 생각에 유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저기…”
“여기가 엄마랑 아버지 무덤이야.. 유미야”
희성이가 비석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생각지도 못했단 희성의 말에 몇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응? 그.. 그럼… 우리가 성묘를 가고 했던 그 공원묘지는..?”
“지금은 거기는 가묘일 뿐이야.. 작년 여름에 아무도 모르게.. 이곳으로 모셔 왔었거든.. 여기 계시는 게 더 어울리는 거 같아서… 그리고 나도.. 평생 잊지 않고 지고 갈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리로 모셔왔어. 언젠가 유미랑 한번 와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렇게나 함께 있었는데 그랬는 줄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랬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위해서.. 그 슬픈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희성을 따라서 유미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저.. 유미에요.. 참 오랜만에 뵙는 거 같아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 올라 가슴이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그리움에 조용하게 가슴으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저..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가슴으로 되묻고 눈을 뜨자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피빛으로 새빨간 꽃들이 무덤 주변에서 가득 피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봉오리였던 꽃잎들이 일제히 만개를 해 있었다.
“희성아.. 저 꽃,,,?”
유미의 목소리에 눈을 뜬 희성이 역시..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이꽃.. 갑자기 핀다고는 들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었네…”
“… 귀신 동백꽃이 피었어…”
유미의 말에 둘은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설마…”
유미도 희성이도 말없이 피어난 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차가운 바람이 숲을 뚫고 지나갔고,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부정의 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꽃들이 수십송이 피어나 두 사람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쁘네… 이 꽃이 이렇게나 이쁜 꽃이었구나…”
신기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조용한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응어리도, 최책감도, 시기와 의심도, 불안과 후회도, 한심함과 열등감도, 슬픔도 고통도, 아픔도, 두려움도 질투도, 외로움도, 짜증도, 그 모든 감정들이 유미와 희성이 안에서 씻겨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나무들 사이로 비쳐드는 청명한 달빛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희성아…”
“응 유미야…”
유미의 가슴 안에서 끓어오른 그 무엇이 자연스럽게 말로 이어졌다.
“사랑해..아주 많이…”
“나도.. 유미야.. 사랑해…”
“기뻐…”
유미가 부끄러운듯한 미소를 띄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말없이 꽃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제 내려가자는 말과 함께 희성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완전히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유미는 먼저 내려가 있으라는 대답이었다. 혼자 생각할 것이 있다고.. 너무 늦지는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유미야.. 너무 어두워.. “
“아 응.. 여기서가 아니라.. 마을을 좀 둘러보고 싶었거든,, 알고 싶은 것도 좀 있고”
희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희성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이제 유미도.. 눈치 챘지?”
유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똑바로 희성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놈이 내 동생인 거…”
희성이의 눈을 본 순간 유미는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랬다. 모든 것이 이제서야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응”
“그럼.. 역에서 왼쪽 길로.. 100미터 정도 들어가면.. 홍문이라고는 하는 작은 술집이 있을 거야..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거기 가서 안주인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친절한 분이시더라”
“.. 응.. 고마워.. 한번 들러 볼게”
어느 사이엔가 평소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사실도 두 사람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만 있었다.
“어서오세요.. 한분이세요?”
“네”
“마실 건.. 뭘 드릴까요?”
“우롱차나 한잔 주세요..”
손님은 자신 이외에 한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카운터 안쪽 자리에서 체격이 좋은 초로의 사내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끔씩 유미쪽을 쳐다 보았지만 유미와 눈이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듯이 보였다. 타지사람이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마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물론 가게나 집의 창문으로 내다 보는 사람들로부터도 어딘가 살펴보려는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유미처럼 늘씬한 젊은 여성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작은 마을인만큼 금방 소문이 퍼졌을 터였다. 험악한 산세가 둘러싸고 있는 외딴 마을. 계곡 사이로 작은 경작지가 있을 뿐이었고, 연안의 바다를 따라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있는 작은 항구가 있는 그런 마을이었다. 조금전까지 희성이와 들렀던 암자는 그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내일.. 날씨.. 안좋겠는데…”
사내는 주름투성이의 작업복을 입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낡고 작은 선술집이었다. 찬장 위에 올려진 TV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를 남자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난방이 되어 있다고는 해도 상반신 T셔츠 차림으로 춥지도 않으려나… 주방의 중년 여성은 여전히 칼질을 하고 있는채로 그저 맞장구만 쳐주고 있었다. 혹시 이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미는 그저 속으로 웃고만 있었다.
“이래서야.. 내일 또 공치겠는데?”
걸걸한 목소리에 굵은 팔뚝. 남자는 뱃사람인듯했다.
“자, 여기.. 바다가 저 모양이라 괜찮은 안주거리가 다 떨어졌다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신선함만은 절대 뒤떨어질 것 같지 않은 산채와 조개의 초무침. 그 먹을 거리만으로도 충분히 양심적일 것만 같아 보이는 가게였다.
희성이의 말대로 이곳에서라면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루에 몇편 밖에 오가지 않을 것 같은 무인역의 역전 거리라고는 해도 한산하기 그지 없는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잡화점에서도, 술집에서도, 거리에서 만난 농부들도 모두, 지훈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금기라도 어기는 듯한 얼굴로 모른다며 피해버리기 일쑤였다. 가게서 쫓겨나고, 문전박대를 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아뇨.. 맛있어 보이는 걸요.. 아.. 저기.. “
“응? 얘기해 봐요”
“.. 이 마을에 살던.. 지훈이라는 사람을 혹시 아세요?”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언뜻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을…?”
역시 이곳이었다. 이곳이.. 지훈이가 태어난 곳이었다. 그리고 희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곳..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을 대신해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도 서울에서 왔나 보지? 얼마전에 들렀던 사람들하고 아는 사인가 보네?”
“또 누가 찾아왔었나 보죠?”
“2주일 정도 전인가… 연말에 말야.. 서울의 무슨 조사회사라고 하면서 걔네 집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갔었거든.. 아가씨랑은 관계 없는 곳인가?”
“아.. 네.. 저랑은…”
또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가 지훈이에 대해… 유미는 그게 지영의 부탁으로 이루어 진 일인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하지만.. 그 친구들… 아무래도 단순한 조사회사 같지는 않아보였어… “
“아니.. 그런 일이 있었수? 난 전혀 몰랐네…”
“홍산댁은 연말에 감긴가 뭔가로 가게 닫았었잖아.. 그 친구들.. 어협 사무실에도 찾아왔길래 쫓아내버렸지. 아무래도 수상해 보여서 말야.. 뭐 아가씨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구만.. 어떻든..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긴 하이.. 그나저나 무슨 일 있나? 요즘 들어 부쩍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말야”
“아.. 아뇨.. 전 그저… 지훈이가 어떻게 지냈었나가 궁금해서요…”
“아가씨.. 지훈이를 아슈? 그 아이.. 그 아이… 잘 지내나 모르겠네.. “
이번엔 여인이 부엌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어 왔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녀요…”
“그래? 그래요? 대학생이 되었구나… 그랬구나.. 잘 됐내… 그 때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을 했었거든요… 혹��.. 아가씨.. 지훈이 여자친구?”
“아.. 아뇨.. 치… 친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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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두워졌으니까.. 발 밑을 잘 보고 걸어…”
희성은 익숙한 듯한 걸음으로 암자의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런 희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유미가 바로 뒤를 붙어서 따라 걸었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좁은 계단이 놓여져 있었다. 석등과 돌난간이 이어지는 급경사의 계단을 한발씩 확인해 나가면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불빛이 없어서 상당히 어두웠지만 유미는 신기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씻겨내려가는 듯한 그런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곳에 암자가 있었네…”
“응 이 암자가 이 절의 본전이래. 아래에 있던 곳은 그냥.. 손님 맞이용이고… 여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한.. 그런 사람들의 슬픈사연들이 있는 그런 암자.. 옛날부터 이어지지 않았던 영혼들을 기리기 위한 암자라는 거 같아. 그렇게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조사하려고 민속학자였던 아버지가 이곳에 와서. 엄마를 만났던 모양이야. 유미야.. 이리 와봐.. 유미가 봐줬으면 하던 게 바로 여기거든…”
“민속학자? 하지만…”
유미는 희성의 아버지가 평범한 회사원인줄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회사도 다니고 있었고, 회사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도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디. 출판사의 영업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민속학자였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여기야.. 유미야”
작은 암자의 옆을 따라 잡풀을 헤치며 10미터 정도 앞으로 들어가자 잡초가 잘 치워진 작은 공간이 나왔다. 키 작은 나무들로 둘러쌓인 그곳에 아무 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사각형의 돌이 놓여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키작은 나무, 마치 비석 같은 사각형의 돌.. 설마… 하는 생각에 유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저기…”
“여기가 엄마랑 아버지 무덤이야.. 유미야”
희성이가 비석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생각지도 못했단 희성의 말에 몇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응? 그.. 그럼… 우리가 성묘를 가고 했던 그 공원묘지는..?”
“지금은 거기는 가묘일 뿐이야.. 작년 여름에 아무도 모르게.. 이곳으로 모셔 왔었거든.. 여기 계시는 게 더 어울리는 거 같아서… 그리고 나도.. 평생 잊지 않고 지고 갈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리로 모셔왔어. 언젠가 유미랑 한번 와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렇게나 함께 있었는데 그랬는 줄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랬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위해서.. 그 슬픈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희성을 따라서 유미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저.. 유미에요.. 참 오랜만에 뵙는 거 같아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 올라 가슴이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그리움에 조용하게 가슴으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저..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가슴으로 되묻고 눈을 뜨자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피빛으로 새빨간 꽃들이 무덤 주변에서 가득 피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봉오리였던 꽃잎들이 일제히 만개를 해 있었다.
“희성아.. 저 꽃,,,?”
유미의 목소리에 눈을 뜬 희성이 역시..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이꽃.. 갑자기 핀다고는 들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었네…”
“… 귀신 동백꽃이 피었어…”
유미의 말에 둘은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설마…”
유미도 희성이도 말없이 피어난 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차가운 바람이 숲을 뚫고 지나갔고,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부정의 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꽃들이 수십송이 피어나 두 사람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쁘네… 이 꽃이 이렇게나 이쁜 꽃이었구나…”
신기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조용한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응어리도, 최책감도, 시기와 의심도, 불안과 후회도, 한심함과 열등감도, 슬픔도 고통도, 아픔도, 두려움도 질투도, 외로움도, 짜증도, 그 모든 감정들이 유미와 희성이 안에서 씻겨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나무들 사이로 비쳐드는 청명한 달빛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희성아…”
“응 유미야…”
유미의 가슴 안에서 끓어오른 그 무엇이 자연스럽게 말로 이어졌다.
“사랑해..아주 많이…”
“나도.. 유미야.. 사랑해…”
“기뻐…”
유미가 부끄러운듯한 미소를 띄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말없이 꽃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제 내려가자는 말과 함께 희성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완전히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유미는 먼저 내려가 있으라는 대답이었다. 혼자 생각할 것이 있다고.. 너무 늦지는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유미야.. 너무 어두워.. “
“아 응.. 여기서가 아니라.. 마을을 좀 둘러보고 싶었거든,, 알고 싶은 것도 좀 있고”
희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희성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이제 유미도.. 눈치 챘지?”
유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똑바로 희성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놈이 내 동생인 거…”
희성이의 눈을 본 순간 유미는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랬다. 모든 것이 이제서야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응”
“그럼.. 역에서 왼쪽 길로.. 100미터 정도 들어가면.. 홍문이라고는 하는 작은 술집이 있을 거야..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거기 가서 안주인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친절한 분이시더라”
“.. 응.. 고마워.. 한번 들러 볼게”
어느 사이엔가 평소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사실도 두 사람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만 있었다.
“어서오세요.. 한분이세요?”
“네”
“마실 건.. 뭘 드릴까요?”
“우롱차나 한잔 주세요..”
손님은 자신 이외에 한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카운터 안쪽 자리에서 체격이 좋은 초로의 사내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끔씩 유미쪽을 쳐다 보았지만 유미와 눈이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듯이 보였다. 타지사람이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마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물론 가게나 집의 창문으로 내다 보는 사람들로부터도 어딘가 살펴보려는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유미처럼 늘씬한 젊은 여성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작은 마을인만큼 금방 소문이 퍼졌을 터였다. 험악한 산세가 둘러싸고 있는 외딴 마을. 계곡 사이로 작은 경작지가 있을 뿐이었고, 연안의 바다를 따라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있는 작은 항구가 있는 그런 마을이었다. 조금전까지 희성이와 들렀던 암자는 그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내일.. 날씨.. 안좋겠는데…”
사내는 주름투성이의 작업복을 입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낡고 작은 선술집이었다. 찬장 위에 올려진 TV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를 남자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난방이 되어 있다고는 해도 상반신 T셔츠 차림으로 춥지도 않으려나… 주방의 중년 여성은 여전히 칼질을 하고 있는채로 그저 맞장구만 쳐주고 있었다. 혹시 이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미는 그저 속으로 웃고만 있었다.
“이래서야.. 내일 또 공치겠는데?”
걸걸한 목소리에 굵은 팔뚝. 남자는 뱃사람인듯했다.
“자, 여기.. 바다가 저 모양이라 괜찮은 안주거리가 다 떨어졌다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신선함만은 절대 뒤떨어질 것 같지 않은 산채와 조개의 초무침. 그 먹을 거리만으로도 충분히 양심적일 것만 같아 보이는 가게였다.
희성이의 말대로 이곳에서라면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루에 몇편 밖에 오가지 않을 것 같은 무인역의 역전 거리라고는 해도 한산하기 그지 없는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잡화점에서도, 술집에서도, 거리에서 만난 농부들도 모두, 지훈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금기라도 어기는 듯한 얼굴로 모른다며 피해버리기 일쑤였다. 가게서 쫓겨나고, 문전박대를 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아뇨.. 맛있어 보이는 걸요.. 아.. 저기.. “
“응? 얘기해 봐요”
“.. 이 마을에 살던.. 지훈이라는 사람을 혹시 아세요?”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언뜻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을…?”
역시 이곳이었다. 이곳이.. 지훈이가 태어난 곳이었다. 그리고 희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곳..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을 대신해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도 서울에서 왔나 보지? 얼마전에 들렀던 사람들하고 아는 사인가 보네?”
“또 누가 찾아왔었나 보죠?”
“2주일 정도 전인가… 연말에 말야.. 서울의 무슨 조사회사라고 하면서 걔네 집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갔었거든.. 아가씨랑은 관계 없는 곳인가?”
“아.. 네.. 저랑은…”
또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가 지훈이에 대해… 유미는 그게 지영의 부탁으로 이루어 진 일인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하지만.. 그 친구들… 아무래도 단순한 조사회사 같지는 않아보였어… “
“아니.. 그런 일이 있었수? 난 전혀 몰랐네…”
“홍산댁은 연말에 감긴가 뭔가로 가게 닫았었잖아.. 그 친구들.. 어협 사무실에도 찾아왔길래 쫓아내버렸지. 아무래도 수상해 보여서 말야.. 뭐 아가씨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구만.. 어떻든..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긴 하이.. 그나저나 무슨 일 있나? 요즘 들어 부쩍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말야”
“아.. 아뇨.. 전 그저… 지훈이가 어떻게 지냈었나가 궁금해서요…”
“아가씨.. 지훈이를 아슈? 그 아이.. 그 아이… 잘 지내나 모르겠네.. “
이번엔 여인이 부엌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어 왔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녀요…”
“그래? 그래요? 대학생이 되었구나… 그랬구나.. 잘 됐내… 그 때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을 했었거든요… 혹��.. 아가씨.. 지훈이 여자친구?”
“아.. 아뇨.. 치… 친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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